항목 ID | GC60001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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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俊恭 |
영어공식명칭 | No Jungong |
이칭/별칭 | 심계(心溪),절효(節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바른 |
출생 시기/일시 | 13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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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397년![]() |
추모 시기/일시 | 1387년 - 노준공 정표(旌表) |
사당|배향지 | 절효사 -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로41번길 41-8[일곡동 567-2]![]()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산(光山) |
고려 후기,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 지역의 효자.
노준공(盧俊恭)[1340~1397]의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노유간(盧有榦), 아버지는 판중추겸밀직사사(判中樞兼密直司事) 노사청(盧士淸)이다. 아들은 셋으로, 병조판서 노영국(盧永國), 이조참판 노영방(盧永邦), 장령(掌令) 노영신(盧永愼)이다.
노준공은 전라도 광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해지자 변을 맛보고,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쾌유를 빌었으나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며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고려 말 당시 상제(喪制)는 100일 동안만 상복을 입는 것이 상례였는데, 노준공의 여묘살이를 국가에서 가상히 여겨 1387년(우왕 13) 10월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조선을 세운 태조(太祖)[1335~1408]가 노준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서석산(瑞石山) 세심계(洗心溪)에 은거하여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 따르면, 태종(太宗)[재위 1400~1418] 때 펴낸 『고산선생속집(鼓山先生續集)』 「절효노공행장(節孝盧公行狀)」에서, 정종(定宗)[재위 1398~1400] 때 노준공에게 절효(節孝) 시호를 내려주고 정문(旌門)을 세워 정표(旌表)하였다고 전한다. 1659년(효종 10)에 노준공을 배향(配享)하는 절효사를 중건하여 사림들이 춘추로 제향(祭享)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