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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80
한자 歷史
영어음역 Yeoksa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열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울특별시 구로구의 역사.

[개설]

한반도 중앙부에 있는 서울특별시 구로구는 1980년에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동면(東面),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이루어졌다.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구로구는 기름진 평야 지대가 있을 뿐 아니라 육로·수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입지 조건을 갖추어서 삼국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고, 서울과 인천·강화의 중간 지점에 있어 많은 사람과 문물이 왕래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는 수출 주도형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여 우리나라 산업화 모델을 제공하였다.

[고대]

구로구의 역사는 비류온조의 남하로 형성된 백제에서 비롯된다. 기록에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에서부터 구로 지역 지명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구로구 남쪽 지역을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을 마한 54개국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맹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551년(진흥왕 12) 백제와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553년 신라가 백제군을 몰아낸 뒤 668년 삼국을 통일하면서 구로 지역은 신라 땅이 되었다. 삼국 통일 이후에도 주부토군으로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 장제군(長堤郡)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경덕왕 때 시행한 한화(漢化) 정책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지명들을 그 음이나 뜻에 의거하여 모두 한자식으로 바꾸고, 주·군·현 간의 영속 관계를 정비하여 지방 제도를 더욱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바뀐 것이다.

시흥시 지역은 고구려가 설치한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서울 영등포구와 관악구, 구로구 동부, 금천구, 경기 광명시 지역], 율목군(栗木郡)[지금의 과천시], 장항구현(獐項口縣)[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지금의 안산시 지역]이었다. 신문왕 때 전국을 9주(九州)로 정비하면서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고, 757년 한산주한주(漢州)로 바뀔 때 잉벌노현곡양현(穀壤縣)과 장구현(獐口縣),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치고, 곡양현을 율진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여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지명을 정비하였는데, 구로 지역은 장제군에서 수주(樹州)로 승격되었고, 995년(성종 14)에는 지방관인 단련사(團練使)가 파견되었다. 1150년(의종 4) 수주에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승격하였다. 도호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설치되었는데, 구로 지역에 백성들의 유망이 늘어나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도 개경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215년(고종 2) 안남도호부에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고,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부평부로 강등되었다.

시흥시 지역은 940년 곡양현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바뀌었고, 995년 금주에 단련사가 파견되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9) 5도 양계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개경 주위에 경기(京畿)를 설치하여 개성부를 포함한 10현을 두었는데 이때 시흥시 지역은 경기 10현 가운데 하나인 수주현(樹州縣)이 되었다. 1069년(문종 23) 지역이 확장되었고, 1172년(명종 2)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지방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도호부·군·현을 두어 각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때 구로 지역이 속한 부평도호부는 전국 44개 도호부 가운데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1592년(선조 25)부터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의 제1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5월 19일 부천의 원미산 장대봉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을 물리치고, 그날로 부평읍에 침입하여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당시 부평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한 왜군은 인천을 함락한 뒤 김포와 통진을 거쳐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시대 구로 지역은 조운 수로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인천과 부평 연안을 지나 강화도 염하 수로를 거쳐 한강 마포나루에서 하역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염하 수로는 물살이 거세어 조운선들이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자 인천 연안에서 한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물길을 내서 조운선을 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자연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으로 수로를 내어 물길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중종김안로(金安老)가 추진한 이 계획은 결국 기술력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876년(고종 13)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면서 마침내 개항을 결정하였다. 1883년(고종 20) 인천항을 개항함에 따라 부평 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13부제를 시행하면서 인천관찰부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로 전환함에 따라 경기도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당시 부평군은 15면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현재의 부평에 해당하는 곳은 상오정면, 하오정면, 석천면, 주화곶면, 옥산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시흥시 지역은 1413년(태종 13) 지방 제도를 개편할 때 금주금천현으로, 과주는 과천현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군과 현에 ‘주(州)’자가 든 고을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금천현과천현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으로 하였다가 2개월 뒤 혁파하였고, 다시 양천현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하였다가 1년 뒤에 금천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1456년(세조 2) 금천현과천현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고, 1795년(정조 19) 금천현시흥현으로 고쳤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시흥현시흥군(始興郡)으로 고치고 안산군·과천군과 함께 인천관찰부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4년 조계를 폐지함과 동시에 부제를 실시하면서 일본 조계 지역과 면 일부를 합하여 인천부로 삼고, 나머지 지역과 부평군을 합하여 부천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부천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신설된 부천군인천부 일부와 부평군을 중심으로 강화군의 일부 섬, 남양군 대부면·영흥면의 섬들을 포함하여 15면 160리에 이르렀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는 문학면 관교리에 있었다. 소사역 일대는 계남면에 해당하였는데 1931년 소사면으로 개칭되었고, 1941년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부천군 15면 가운데 계남면·오정면·소래면이 현재의 부천시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항거한 3·1운동이 일어나자 부천에서도 격렬한 항일 시위가 전개되어, 1919년 3월 24일 계남면사무소가 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판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부천을 중심으로 항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시흥시 지역은 1913년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전국 12부 317군이었던 행정구역을 12부 220군으로 통폐합하여 과천군·안산군을 시흥군으로 통합하였고 소재지는 영등포에 두었다. 1914년 경성을 제외한 지역을 개편하였는데 경기도 시흥군 북면[도림리, 구로리], 경기도 시흥군 동면[독산리, 가리봉리, 시흥리],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고척리, 개봉리, 오류리, 궁리, 온수리, 천왕리, 항리] 등이 구로 지역에 포함되었다.

1916년 경기도령 4호에 따라 시흥군 면 폐합을 실시하여 신북면을 폐지하고 노량진리·본동리·흑석리·동작리는 북면에, 사당리는 신동면에 편입되었다. 1917년 영등포리·당산리·양평리를 신설한 영등포면에 편입하였고 나머지는 북면에 남기었다. 1931년 시흥군 영등포읍으로 승격하였고, 1936년 시흥군 영등포읍 북면 일부 지역을 서울로 편입하여 영등포출장소 관할에 두었으며, 동·리·면을 모두 일제식 정(町)으로 바꾸었다. 1943년 시흥군 영등포읍이 시흥군 영등포구역소로 변경되었다.

[현대]

1946년 일제식 이름을 한글식 이름으로 환원하였고, 같은 해 10월 18일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따라 영등포구역소영등포구로 변경되었으며,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구로리·도림리·번대방리, 경기도 고양군 수인면·둑도면·은평면의 42개 동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는데 이 가운데 시흥군 동면 구로리·도림리·번대방리영등포구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따라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발전 계획을 수립함에 따라 영등포구 구로동·가리봉동·독산동 등 남부 지역을 나누어 신설한 구로구에 편입하여 독자적인 행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구로 지역 발전의 원동력은 근대화로, 그 중심은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단이었다. 구로 지역은 서울과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으로서 교통의 요지이며, 1960년대 이후 수출 주도형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구로공단이라는 대명사로 더욱 알려졌고, 우리나라 산업화의 모델을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2.09 [고대] 수정 <변경 전>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 지역], <변경 후>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관악구, 구로구 동부, 금천구, 경기 광명시 지역],
이용자 의견
잉** 고구려가 설치한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 지역]이라는 단락에서 잉벌노현은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관악구, 구로구 동부, 금천구, 경기 광명시 지역'으로 정정바랍니다. 지금의 시흥시 지역은 당시에는 매소홀현(지금의 인천), 장항구현(지금의 안산)이었습니다.
  • 답변
  • 디지털구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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