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리 구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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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리 구수마을에서 고추는 효자 작물이다. 용돈도 벌고 가용으로도 쓰고 타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추는 우리 밥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작물이다. 고추가 없는 우리의 식단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구수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점점 더 수입 고춧가루가 우리의 식단을 장악해 가고 있지만, 일손이 없어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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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에 속하는 행정면.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와공면(瓦孔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에서 ‘공(孔)’자와 ‘음(音)’자를 따 공음면(孔音面)이 되었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興德郡)이 고창군에 통합될 때, 와공면과 동음치면의 병합으로 공음면이 되어 12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법정리로는 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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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서 출발하여 구암중앙교회를 지나면 길 건너에 석교리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석교리’라고 쓰여 있는 크고 굵은 글씨와 그 아래 ‘동촌, 창촌’이라 쓰여 있는 표지석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큰 마을이 나온다. 마을 인가를 몇 채 지나면 커다란 당산나무를 볼 수 있는데, 운치 있는 나무를 보면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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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면 구암리는 본래 무장군 동음치면에 속해 있었는데,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구암(龜岩)’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을 새롭게 고치면서 동음치면 덕음리(德音里)ㆍ구수리(九水里)ㆍ장동리(壯洞里) 전체와 성재리(聖才里)ㆍ다옥리(多玉里) 일부, 하리면(下里面) 택동리(宅洞里)와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면(弘農面) 덕림리(德林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암리(龜岩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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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터미널에서 26㎞ 가량 떨어져 있는 공음면 구암리는 전라남도 영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특히 큰샘이 있어 ‘샘거리’라고 불리는 구암리 마래마을 마래주유소 주변은 도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뒤섞여 있다. 길 하나, 도랑 하나, 담장 하나, 밭두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50,000 지형도」에서도 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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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면 구암리의 1년은 여느 농촌 마을과 비슷하다. 연초에는 영농 경작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마을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거나 마을 총회를 통해 영농기술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2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그리고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에는 당산나무 그늘이나 마을회관에서 수박이나 백숙으로 삼복더위를 식힌다.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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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면 구암리 장동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하얀 조립식 주택과 흙벽으로 만들어진 창고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대나무밭 뒤편에 개간된 밭이 옛 ‘송총’이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송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송총의 주인은 바로 송문수이다. 송문수(宋文洙)[?~1894. 12. 5]는 무장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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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리 구수마을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윤오[1938년생] 씨를 가리킨다. 그래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그에게 구수내[구수마을]에 관한 역사나 인근 지역의 역사에 대해 물어 볼라치면 “어찌 다들 나한테만 물어 본다요?” 하면서 쑥쓰러워한다. 하지만 그 기색이 어쩐지 싫지만은 않아 보인다. “구수내라고 헌 것은, 그 전에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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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례 [1944년생] 씨는 열아홉 살인 1963년에 전라남도 영광의 우평마을에서 이곳 구암리 구수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래서 택호가 ‘우평댁’이다. 그녀는 2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과는 일찍 사별하고 자녀들이 모두 외지에서 사는 바람에 구수내에서 혼자 살고 있다. “옛날에는 있었어. 옛날에 이 동네는 없어도 우리 큰집에 있었어. 옛날에는 시렁마다 얹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