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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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구조물. 건축은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쉼터와 안락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다양한 인간 활동을 위한 유용한 공간도 제공한다. 건축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주거 건축, 종교 건축, 관청 건축, 휴양 건축, 복지와 교육 건축, 상업과 공업 건축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각 영역별 건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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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 석탄정은 1581년(선조 14)에 석탄(石灘) 유운(柳澐)이 낙향하여 학문을 강의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특히 정자 주변의 노송과 고목들이 아름답고 소박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봉덕리에서 율계리로 오는 지방도 15호선에서 고창군 보건소로 가기 전 갈림길 왼쪽 석탄마을 안에 있다. 석탄 유운이 세운 석탄정은 동쪽과 서쪽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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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에 있는 유탁(柳濯)을 비롯하여 서홍도(徐弘渡), 유운(柳澐), 안정(安貞), 서일남(徐馹男), 유경원(柳慶元), 유동인(柳東仁), 유철견(柳鐵堅), 안진(安晉), 유여회(柳汝檜), 유지태(柳之泰) 등을 배향하는 일제 강점기 사당. 벽산사(碧山祠)에는 유탁(柳濯)을 비롯하여 서홍도(徐弘渡), 유운(柳澐), 안정(安貞), 서일남(徐馹男), 유경원(柳慶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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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합성어이다. 누정은 정자의 고유 명사인 정호에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건축물로, 주로 마루로 되어 있다. 참고로, 정호에 당(堂)이나 각(閣), 태(台) 등의 문자가 붙은 건축물이라 해도 마루가 주가 되어 사방으로 트인 건축물이라면 누정으로 본다. 한편,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정호라도 건축물의 구조가 방과 부엌 중심이라면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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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이다. 189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석탄(石灘) 유운(柳澐)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수당(睡堂) 유지성(柳志聖)이다. 아버지는 유기춘(柳基春)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병현(李秉賢)의 딸이다. 큰아들은 유호석이고, 작은아들은 유태석이다. 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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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선명(善明), 호는 금서(錦西)이다. 1857년(철종 8)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석탄(石灘) 유운(柳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리(東里) 유지기(柳志冀)이다. 유준철(柳浚喆)은 1869년(고종 6)인 13세 때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 연상(蓮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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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율계리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과 밤나무가 많아 ‘밤계’·‘방계’ 또는 ‘율계(栗溪)’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 후기 동래정씨(東萊鄭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신반리(新半里)·발막리(鉢幕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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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주곡리는 풍수지리상 지형이 거미 형국이라하여 ‘거미(무)실’ 또는 ‘거미[蛛]’를 써 ‘주곡(蛛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1562년 고흥유씨(高興柳氏) 석탄(石灘) 유운(柳澐)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오동면(五東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상평리(上坪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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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교흥리에 있는 이존오(李存吾), 류희춘(柳希春), 손홍립(孫弘立)을 기리는 사당.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 경암(警菴) 손홍립(孫弘立)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충현사는 무장면 교흥리 무장향교로 들어가는 진입로 옆에 있다. 1589년(선조 22)에 창건되었다가 정유재란에 화를 입고 1608년(선조 41)에 중건하였다.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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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한문으로 된 한시, 학문, 한학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고창에서의 한문학은 고려 초에 본이 흥덕인 장연우(張延祐)에서 부터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당시 중앙에 고창 인맥층이 두터워지면서 오세재(吳世才) 등 한문학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오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이 약해졌으나 유학이 진보를 거듭하여 김경희(金景熹), 김질(金質), 오희길(吳希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