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79
한자 孝行- 儒學- 本鄕, 葛溪 -
영어공식명칭 Homeland of Filial Piety and Confucianism, Galgye Maeul
이칭/별칭 갈천 마을,갈천동,치내,숲옛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갈계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0년경 - 은진 임씨 임천년이 인근의 함양에서 옮겨와 정착하여 갈계 마을 이룸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효행과 유학의 본 고장으로 이름난 농촌 전통 테마 마을.

[개설]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갈계 마을은 1450년쯤에 은진 임씨(恩津 林氏) 임천년(林千年)이 인근의 경상남도 함양에서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열렸다. 갈계 마을은 600여 년의 역사적인 유래를 가진 은진 임씨의 집성촌이자 의령공파 종가가 있는 곳이다. 본래 갈천동 ‘치내’라고 하였다. 갈천 임훈이 호를 갈천이라고 하면서, 마을 이름을 갈계로 고쳤다. 갈계 마을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한 지방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자연 경관과 지리적 환경]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갈계 마을은 경상남도 최서북단인 거창군 북상면에 있다. 덕유산 국립 공원에 속하는 고도 1,492m의 무룡산(舞龍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자연 마을로서 산촌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룡산’이라는 지명은 용이 춤추는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의 지명인 불영산(佛影山)은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이다. 무룡산 동쪽에는 시루봉과 다람봉이 있으며,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산수천이 흐르고 있다. ‘갈계 마을’이라는 지명은 산에 칡이 많고 계곡의 내가 맑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갈계 마을거창읍으로부터 마리면위천면을 경유하여 18㎞의 거리에 있다. 덕유산 국립 공원 구역에 속하는 일부 지역은 깊은 계곡과 맑은 물 등 거창군의 대표적인 유원지이다. 북쪽의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군, 서쪽의 경상남도 함양군과 호음산을 경계로 고제와 위천면과 접하고 있으며, 백두 대간 아래 마을이다. 갈계 마을은 승용차로 서울에서 3시간 반 거리, 대전에서 2시간 거리, 대구에서 1시간 반 거리, 부산에서 2시간 반 거리, 거창읍에서 20분 거리에 있다. 거창 국제 연극제가 진행되는 위천면 수승대 국민 관광지가 갈계 마을에서 4㎞ 거리에 있다.

월성 계곡성천북상면 소재지에서 송계 계곡에서 시작된 소정천을 만난다. 소정천은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갈계숲[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28-1, 1982년 11월 23일 거창군 천연 보호림 제2호로 지정]을 형성한다. 숲에는 경모재, 병암정, 도계정, 가선정, 가선대부비 등 은진 임씨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북상 초등학교 옆에 있으며 거창 군민들이 지금도 여름휴가와 야유회를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남덕유산 방향의 월성 계곡에는 사선대, 장군바위, 분설담, 강선대 등의 자연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경치가 좋기로 이름나 있어서, 옛날부터 심진동, 화림동, 원학동을 안의 3동의 명승지라 불렀다. 이 중 용암정[국가 문화유산 명승 제88호 지정]이 있는 지역은 원학동 명승지에 속한다. 원학동(猿鶴洞)은 이름 그대로 잔나비와 청학을 상징하는 신선의 세계를 뜻한다.

거창 갈계리 임씨 고가[경상남도 민속 문화재 제9호]는 용암정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6㎞ 떨어진 갈계 마을에 있다. 마을 초입에는 은진 임씨의 효행과 정절을 기리는 거창 갈계리 은진 임씨 정려각[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34호]이 있어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임훈이 아우 임운과 함께 건립하였고 1878년 후손들이 고쳐 지은 갈천 서당[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 295호]이 있다. 그 외에도 장판각, 서간 소루[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252호] 등 고택을 포함하여 갈천 선생 문집 책판 및 첨모당 선생 문집 책판[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68호] 등이 있다.

[마을의 현재 모습]

2016년 현재 갈계 마을의 총 가구 수는 129가구[농가 80가구, 비농가 49가구]이고, 총 인구수는 282명[남자 140명, 여자 142명]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불교 신자는 약 20%, 기독교 신자는 약 5%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무교이다. 마을의 주요 생산품은 ‘우렁이 쌀’, ‘사과’, ‘딸기’, ‘고사리’, ‘벌꿀’ 등으로, 갈계 마을 주민이 대부분 종사하고 있는 생업은 농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갈계 마을은 ‘숲옛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전통 테마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갈계 마을덕유산 자락이 품고 있고, 송계 계곡월성 계곡을 끼고 있어 산골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마을 사람들은 전통문화유산[고가, 재실, 정자, 서당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갈계 마을만의 특징을 살리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마을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하자는 공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마을은 당일 또는 1박 2일의 일정으로 떡메치기, 갈계 숲에서 보물 찾기, 자전거 타기, 전통놀이, 숯불 바베큐, 탈 꾸미기 등의 만들기 체험, 농산물 수확 체험, 엿 만들기, 두부 만들기 등의 ‘마을 소개 및 문화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최근에 갈계 마을은 웰빙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를 나라 전체에서 받고 있다. 이것은 건강한 먹거리와 숲 체험을 통해 몸과 마음을 푹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갈계 마을은 2014년 문화재 지정 농촌 전통 테마 마을 중에서 ‘으뜸촌 마을’로 경관, 서비스, 체험, 숙박, 음식 등 모든 부분에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마을 기업으로 ‘숲옛 마을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조합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생산한 고추나 벌꿀 그리고 고사리 등의 판매도 대행하고 있다.

[마을의 내력과 의의]

갈계 마을은 조선 초기 온 나라 선비들을 통틀어 여섯 현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던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과 그 동생 첨모당(瞻慕堂) 임운(林云)[1517~1572] 형제가 살았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은진 임씨의 집성촌이자 의령공파 종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은진 임씨는 임자미(林自美)를 득관 시조로 한다. 임자미는 고려 숙종 때의 인물로 본래는 팽성[平澤]을 본관으로 하는 임씨였으나 시진군(市津君)[시진은 은진의 옛 이름]에 봉해진 후 본관을 은진으로 삼아 분관하였다. 고려 후기 조청랑·태상박사를 역임한 임성근(林成槿)이 일세조이다. 공은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유신의 충절을 지켜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3세손인 임식(林湜) 때에 경상도 함양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4세 손인 임천년은 의령 현감을 역임하였다. 공은 평소에 산수에 뜻을 두다가 마침내,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인,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갈천동(葛川洞)으로 옮겨서 정착하였다. 6세 손 임득번(林得蕃)은 성균진사로서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차분하였으며 지조가 고결하였다. 부인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임득번은 2남을 두었으니, 맏아들 임훈은 은일의 선비로 추천되어 벼슬이 장례원판결사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이 ‘갈천 선생(葛川先生)’으로 일컬었고, 둘째 아들 임운은 이조의 특천을 받아 연은전 참봉이 되었으나 일찍 죽어 뜻을 크게 펼쳐 보지 못하였다. 형제가 모두 효행이 지극해 마을에 두 개의 정문(旌門)이 나란히 세워졌고 순수한 효우와 심오한 학문으로 세상의 사표가 되어, 형제 모두가 용문 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선비 정신과 효도 문화의 본고장]

경상도 유교 문화의 대표 지역을 꼽으라면 좌안동(左安東), 우안음(右安陰)[현재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은 정통 유교[성리학]의 고을이다. 거창 유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선비 정신’이다. 거창 사람들은 ‘충의와 절의를 숭상’함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것에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 임훈임운 두 형제의 공이 크다.

임훈은 조정에서 여섯 현인의 한사람으로 천거되어 본격적으로 출사하기까지, 대체로 고향인 안음현 갈천동에서 은거하면서 치열한 경명행수(經明行修)[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름]의 길을 걸었다. 젊어서부터 ‘성(誠)·경(敬)’ 중심의 실천 철학을 확립하여 스스로를 경계하고 단속하는 데에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훈은 출사하여 임지로 떠나기 전 임금과 접견했을 때, 민생의 피폐를 구제함이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진언하였다. 임훈은 그 출발점으로 임금에게 치도의 요체로서 정심(正心)과 수신(修身) 공부를 강조하였다. 동시에 임금에게 반드시 퇴계 이황과 같은 현인을 좌우에 두고 보필과 가르침을 받을 것도 진언하였다. 관직을 얻어 고을에 부임한 뒤에는 한결같이 고을의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삶이 지치고 쇠약해진 점을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 폐단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혁파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훈은 물러나 초야에 은거할 때나 나아가 관직에 있을 때를 막론하고, 항상 국사의 옮고 그름과 민생의 평안함과 근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동생 임운은 『맹자』를 읽어 대의에 통달하였고 이내 백가의 글을 두루 섭렵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나 사람을 가르칠 적에 항상 인륜을 독실이 하여 반드시 몸소 실행하려고 힘썼다. 그래서 향리의 사람들이 많이 교화되었다. 임운은 오직 퇴계 이황만을 흠모하여 서울과 도산 서원에서 여러 번 찾아뵙고 성리학을 강마하였다.

두 형제는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진 큰 학자로서 성리학의 애민 정신과 민본 사상을 토대로 한 학문과 덕행이 한 시대를 빛냈다. 형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과 도의 지교를 맺었고, 국왕에게 간언하는 등 강직한 선비 정신의 표본을 보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표적인 대의의 인물이자 임훈의 문인인 동계(洞溪) 정온(鄭蘊)은 스승인 임훈의 학통을 따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계광해군 시절 영창 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 제주 대정에서 1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려 하자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강직한 선비 정신은 스승인 임훈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임훈임운 두 형제는 효행으로 왕으로부터 생정려(生旌閭)를 받았다. 두 형제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 여막 아래에서 거상하면서 3년 동안 질대(絰帶)를 벗지 않았으며, 한 번도 궤연(几筵)[죽은 사람의 영궤(靈几)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는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임훈은 부친의 연세가 팔순이 넘자 부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임훈은 아우인 임운과 더불어 부친을 곁에서 모시며 즐겁게 해드렸다. 현제의 봉양하는 방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온화한 기색과 즐거운 태도로써 어버이의 이목과 심지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한껏 힘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훈의 나이 62세[임운의 나이 45세] 때 부친상을 당했는데, 형제는 반년 동안 약을 달여 병구완을 하면서 슬픔과 걱정으로 날을 지새고 나태하지 않았다. 급기야 부친이 돌아가시자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넣지 않은 지가 사나흘이나 되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 억지로 구활하여 간신히 소생시켰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는 여막에서 거상하면서 날마다 세 번씩 상식을 올리며 몹시 슬프게 곡읍을 하였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철에도 항상 몸에 상복을 입고 거상하였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한 상제를 실천하였다. 형제의 효행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갈계 마을 사람들 사이에 흠모하는 마음과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게 펴져나갔다. 그러자 고을의 관장이 형제의 효행을 본도에 알렸고, 이에 관찰사 이우민이 조정에 아뢰었다. 그 이듬해인 1564년(명종 19)에 임금이 형제가 사는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후에도 갈계 마을은 후손들이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임훈의 8대손 임지예, 임영의 9대손 임경원도 정려를 받았으며, 임운의 9대손 임한신은 정려를, 임한신의 처 고령 박씨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여 정려를 받은 것이 그 증거이다.

[국민 관광지 수승대와 함께 하는 마을]

갈계 마을은 경상남도 최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자연 마을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좋은 만큼 접근하기가 어려워 개발 등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제 ‘불편함’이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도래했다. 최근 들어 지금까지 ‘편리함’을 문명의 은혜로 알고 살아왔던 이들이, 편리함이라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오히려 ‘불편함’을 찾아 자연이나 전통 마을로 찾아 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최근에 많은 도시인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실용적이라고 여기고 있던 것들이 오히려 비실용적이고, 비실용적이라고 간주되던 것들이, 사실은 실용적이거나 혹은 더 실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불편이 새로운 의미의 편리, 즉 실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북 안동의 하회에 있는 전통 가옥은 불편한 잠자리와 시설로 정평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불편한 잠자리에서 하룻밤 유숙하려고 특급 호텔에 준하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갈계 마을에는 아름다운 경관, 맑은 공기 등의 산촌 마을의 정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유산인 고가, 재실, 정자, 서당 등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갈계 마을은 선비 정신, 효행 정신 등의 이제는 잊혀져 가는 우리나라 아름다운 정신 문화의 본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핵심적 공공재가 될 수 있는데,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미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갈계 마을 자체의 독창적인 브랜드 전략이나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 등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수승대 국민 관광지가 갈계 마을에서 4㎞ 거리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거창 국제 연극제와의 연계 등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안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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