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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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山書屛 |
영어음역 | Oksan Seobyeong |
영어의미역 | Screen of Callingraphy by Oksan |
이칭/별칭 | 옥산초서병풍,초서 귀거래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죽헌동 201번지]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호희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옥산(玉山) 이우(李瑀)[1542~1609]가 어린 시절에 쓴 초서로 만든 병풍.
[개설]
옥산서병(玉山書屛)은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이자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사위인 이우가 어렸을 때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초서로 쓴 글씨를 뒤에 장황하여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민태식(閔泰植)이 원래 자기의 소유였던 것을 1965년 강릉시에 양여(讓與)하여 율곡 기념관[현 오죽헌·박물관 내에 위치]에 기증한 것으로 병풍 말미에 그에 관한 내용의 발문이 한 폭 붙어있다.
[제작경위]
처음부터 병풍을 만들기 위하여 쓴 글씨는 아니며 원래 17매의 종이 서첩(書帖)이었던 것을 뒤에 10폭의 병풍으로 고쳐 제작한 것이다.
[형태]
원래 서첩 17매 가운데 13매는 세로 42㎝이고 나머지 4매는 세로 34㎝로 그 길이가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의 크기는 24㎝로 대체로 일정한 편이다.
[구성]
옥산서병(玉山書屛)은 초서 9폭과 발문 한 폭으로 전체 10폭으로 구성된 병풍이다. 행에 따라 잘라 만든 17면을 현재 10폭의 병풍에 한 폭 당 2면씩 장황하여 제1폭부터 제9폭까지는 이우의 초서로 꾸며졌으며 제10폭에는 1965년 9월에 김순동(金舜東)이 쓴 한문·국문의 발문이 있다. 이 발문에는 친우 동교(東喬) 민태식(閔泰植)이 이 필적을 소장하다가 율곡기념관에 기탁했음을 밝힌 내용이 적혀있다.
[특징]
이우의 초서 「귀거래사(歸去來辭)」 전문(全文) 가운데 중간의 87자가 결락되어 있으며 제5폭의 9번째 면과 10번째 면 사이에는 84자가 없다.
이우는 어렸을 때 어머니 신사임당의 서체를 이어받았고 혼인 후에는 장인인 황기로의 서체를 따랐는데, 「귀거래사(歸去來辭)」 말미에 ‘丙辰暮春玉山書似(병진모춘옥산서사)’라 기록되어 있어 이우가 15세였던 1556년 3월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이우의 초기 서체가 사임당의 서체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우의 장인이자 스승이었던 황기로는 이우의 초서 쓰는 법을 칭찬하며 “곱게 쓰기는 나만 못하되 웅건하기는 나보다 낫다”라고 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은 「옥산시고서」에서 ‘옥산의 글씨는 정묘하고 웅건하여 용과 뱀이 날아 올라가는 것 같아 그 글씨를 얻는 자는 저 값진 보석보다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라고 기록할 정도로 이우의 글씨는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