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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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師任堂草書屛風 |
영어음역 | Sin Saimdang Choseo Byeongpung |
영어의미역 | Cursive Script Written by Sin Saimdang on a Folding Scree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죽헌동 201번지]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호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3년 7월 31일 - 신사임당초서병풍,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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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신사임당초서병풍,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성격 | 서예 |
제작시기/일시 | 조선 중기[16세기] |
제작지역 | 알려지지 않음 |
작가 | 신사임당 |
양식 | 사임당 서풍 |
재질 | 종이[지본묵서] |
서체/기법 | 초서 |
가로 | 33.5㎝ |
세로 | 44.2㎝ |
소장처 |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내 율곡기념관 |
소장처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죽헌동 201번지] |
소유자 | 강릉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유형문화재 |
[정의]
조선시대 여류서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초서로 쓴 당시(唐詩) 오언절구 6수의 8폭 병풍.
[개설]
신사임당초서병풍은 신사임당이 쓴 당시(唐詩) 오언절구(五言絶句) 6수의 초서를 뒤에 병풍으로 꾸민 것으로 강원도 강릉시 두산동의 최돈길(崔燉吉) 고가(古家)에서 지속적으로 전해내려 왔으며, 1971년에 강릉시가 넘겨받아 현재 율곡기념관[현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내에 위치]에 보관되어 있다.
[제작경위]
신사임당의 초서 작품은 원래 신사임당의 조카 권처균(勸處均)에 의해 전해지다가 그의 딸이 최대해(崔大海)와 혼인하면서 시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 영조(英祖) 때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넘어가 잃었던 것을 강릉부사 이형규(李亨逵)[1733~1789]가 그 사연을 듣고 되찾아 최씨 집안에 돌려주면서 병풍으로 꾸며 보관하게 하였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최씨 집에 불이 나서 온 집안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그 당시 최씨의 부인이었던 강릉김씨가 80세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불길 속에서 제일 먼저 이 병풍을 끌어낸 뒤 숨졌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 당시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1805~1886]가 같은 일이 다시 있을까 우려하여 이 병풍의 글씨를 베끼어 따로따로 판각(板刻)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현재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형태]
세로 44.2㎝, 가로 33.5㎝ 크기의 닥나무종이에 당시(唐詩) 오언절구 6수를 초서로 쓴 형태이다.
[구성]
신사임당초서병풍은 총 여덟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사임당이 초서로 쓴 당시(唐詩) 여섯 수가 제1폭~제6폭을 이루며, 병풍 말미의 2폭 중 제7폭은 강릉부사로 재직했던 이형규(李亨逵)의 1774년(영조 50) 발문이, 제8폭은 강원도지사 이용(李龍)의 1963년 발문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의 1971년 발문이 장황되어 있다. 강릉부사 이형규의 발문에는 신사임당초서병풍이 전하여 오게 된 연유가 적혀있다.
[특징]
현재 이 필적에는 오랜 세월의 우여곡절을 거친 탓에 더렵혀진 자취가 있으며 흐릿해지고 점획을 보묵(補墨)한 자취도 있으나 운필이 워낙 뚜렷하기 때문에 점획과 자형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글씨를 시작할 때 붓을 명확히 대고 써내려가다가 붓을 거두는 마지막에 깔끔하게 삐치거나 눌러주었다. 이러한 필법 때문에 까실하게 갈라진 붓질이나 지나친 비백(飛白)[획을 나는 듯이 그어 그림처럼 쓴 글씨체]도 없다. 또한 글자마다 중심이 되는 세로획과 가로획을 해서(楷書)처럼 곧고 반듯하게 긋고 나머지 획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이 필적은 초서 자형이면서도 둥그런 원필세(圓筆勢)가 또렷하다. 점획이 매우 간정하고 자형이 명료하며, 짜임이 단정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풍격을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신사임당을 비롯해 16세기 중후반과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초서 명필들의 글씨는 간정한 점획, 단정한 짜임, 원필과 직필의 조화 등으로 요약된다. 신사임당은 16세기 초기에 서풍의 한 계통[사임당 서풍]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초서 명필로서 신사임당의 서풍을 뚜렷하게 따랐거나 부분적으로 수용한 사람으로는 신사임당과 사돈지간이었던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 옥산(玉山) 이우(李瑀),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부자(父子), 그리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등이 있다.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