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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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圭永 |
영어음역 | Jeong Gyuyoung |
이칭/별칭 | 명여(命汝),일옥(一玉)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병준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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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생년 | 1857년(철종 8) |
몰년 | 1932년 |
본관 | 초계(草溪)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초계. 자는 명여(命汝), 호는 일옥(一玉). 홍문공 정배걸(鄭倍傑)의 29세손이며 교리 정창(鄭昌)의 15세손이다. 아버지는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 어머니는 안동김씨이며, 부인은 양천허씨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정인상(鄭寅尙)이다.
[활동사항]
정규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지내던 중 9살에 모친상을 당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늘 생각하여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고 오는 손님도 사절하며 두 형과 같이 아버지에게 더욱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노환으로 병이 깊고, 담수(痰嗽)가 심하여 메추리를 먹고 싶다고 하자 정규영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어디서 메추리를 구한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였다. 수일간 산야를 헤매다 다행히 메추리 두 마리를 얻어 봉양하였더니 아버지가 차도를 보였고, 그 후 바위틈에서 산삼을 얻어 봉양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천수를 다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두 형과 예법대로 상례를 행하고 3년간 시묘에 매일 묘소를 다녔다. 상을 마친 후에도 매 삭망에 성묘하고, 사랑방을 첨망헌(瞻望軒)이라 하여 묘를 향해 앉아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였다.
1920년 봄, 육영 사업에 힘을 쏟아 여러 인사들을 규합하여 도장동에 도장재(道莊齋)를 신축하고 정돈영(鄭敦永), 정세영(鄭世永), 박창현(朴昌鉉) 등을 초빙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를 통해 선비들에게 유풍을 불러일으킨 공이 크므로 김형식(金亨湜), 서상효(徐相曉), 박우봉(朴遇鳳), 박창현 등이 「도장재기문(道莊齋記文)」을 찬하여 정규영의 공적을 기렸다. 1932년 11월 13일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일옥유고(一玉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0년 후손들이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정규영 효자비를 세웠다. 후손 정용환(鄭用煥)이 찬하였으며, 내용은 ‘효자일옥처사정공지비(孝子一玉處士鄭公之碑)’이다. 1978년 9월 운곡서원을 위시한 15개 서원과 음성, 진천, 괴산, 충주 각 향교 재임 제관 일동이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상모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