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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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仍忽縣 |
영어음역 | Ingholhyeon |
이칭/별칭 | 설성(雪城),잉근내(仍劤內),음성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예경희 |
[정의]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 고구려가 설치한 행정 구역.
[개설]
음성은 잉홀(仍忽)·설성(雪城)·잉근내(仍劤內)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잉홀의 지명은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12월에 음성으로 변경되었다.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약물제 동쪽에 터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문동(龜文洞)이라고도 하는 이 마을은 고구려 때 잉홀현의 관청이 있어 ‘터골’이라고 하였고 ‘터골’ 앞에 관평(官坪) 또는 관들이라 하는 관에서 경작하던 농경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제정경위 및 목적]
마한의 54개국 중 소국이었던 백제국이 주변의 여러 소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한강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마한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고 나중에 백제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백제의 성장에 따라 마한 지역이 백제에 통합되자 충청북도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 정책으로 475년(장수왕 63)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지배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충청북도의 북부 지역인 음성·진천·제천·단양·영춘 지역이 고구려의 행정 구역으로 편성되었고 고구려는 확보한 지역에 대하여 지명을 부여하였는데 이때 음성을 잉홀현이라고 하였다.
[관련기록]
『삼국사기』「지리지」를 비롯한 모든 지지류에 음성은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이었는데 신라가 취한 후 경덕왕 때 음성현으로 개칭하고 흑양군(黑壤郡)[지금의 진천]의 영현(領縣)이었다”고 하였다.『고려사』권10 「지리지」도 동일한 내용이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르다가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는 내용만 추가되었다.
그런데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본래 백제의 잉홀현이었는데 고구려에 예속된 뒤 신라시대에 음성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여 잉홀현이 백제의 지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내용]
음성의 옛 이름인 잉홀(仍忽)은 이두식 표현으로 잉(仍)은 물이고 홀(忽)은 골을 의미하여 현대어로는 물골이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물이 풍부하여 사계절 가뭄이 없는 살기가 좋은 고을이라는 뜻에서 부친 이름이다. 잉홀현은 처음에는 노음죽현에 속했으나 후에 금물노군(今勿奴郡)에 속하였다. 661년 신라 문무왕 때 서원경에 속한 잉홀현이었고 757년(경덕왕 16)에 흑양군에 속하였다가 음성으로 개칭되었다.
[변천]
삼국의 항쟁기에 고구려는 음성·진천·도안·연풍을 잇는 선의 이북을 점령하였고, 백제는 청주·청원 일대를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보은·옥천·영동 일대의 남쪽을 점령하였다. 삼국시대의 말기 대략 6세기 중반에 신라 진흥왕의 북진 정책에 의하여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므로 음성을 포함한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신라에 예속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