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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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犀 |
영어음역 | Bak Seo |
이칭/별칭 | 양종(洋宗),죽계(竹溪),충정공(忠靖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윤규현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 귀주대첩에서 공을 세워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진 후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시조가 되었다. 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박인석(朴仁碩)이다.
[활동사항]
박서는 무과에 급제한 후 1202년(신종 5)에 아버지가 진주도 안찰부사(按察副使)로 도적을 평정한 공에 의해 내시(內侍)로 근무하게 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된 후 수의어사(繡衣御使)를 거쳐 1231년(고종 18)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이르렀다.
동년 9월 몽고군이 침입하여 귀주대첩이 전개되자 김중온·김경손 등 분도장군과 인근 고을 수령을 대동하고, 임기응변 전투를 벌여 귀주성(龜州城)을 굳건히 지켰다. 이 일로 고종은 예성강까지 친히 마중을 나와 손을 내밀어 박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경은 참으로 만고의 충신이요, 만고의 명장이다. 그 공을 무엇으로 갚으리”라고 하면서, 금화 열여섯 송이를 투구 좌우에 꽂아 주고 어주삼배(御酒三盃)를 내렸다.
그러나 3월이 되어 몽고 사신이 귀주에 있을 때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조정에서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모함을 당하자, 낙향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살아갔다. 이듬해 몽고가 재차 침략하자 조정에서는 박서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제수하고 음성백에 봉하여 회유하였으나, 박서는 “나에게 정승을 준들 무슨 소용이랴” 하며 받아들이지 않다가 나이 팔순에 이르러 죽었다.
[묘소]
예부터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박산솟골에 거대한 묘가 박서 장군 묘라고 전해오고 있다.
[상훈과 추모]
1456년(세조 2) 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신라·고구려·고려·조선의 무장을 배향하면서 함께 배향하고, 1686년(숙종 12) 함흥 용강서원(龍江書院)을 건립 배향하였다. 1703년(숙종 29) 평안북도 귀주성에 박서가 군사 훈련을 시키던 장소에 정공사우를 세워 배향하였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1980년 5월 6일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석성리 학령산에 다시 용강서원을 세웠다. 매년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에 고손자 박순과 함께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