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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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宮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출생 시기/일시 | 1916년 2월 15일 - 남궁련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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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0년 - 남궁련 니혼대학 경제학과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남궁련 극동 해운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2006년 2월 22일 - 남궁련 졸 |
출생지 | 남궁련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성격 | 경제인|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함열 |
대표 경력 | 대한 조선 공사 회장|경제 과학 심위회 위원|금융 통화 위원회 위원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 출신의 경제인이자 정치인.
[활동 사항]
남궁련(南宮鍊)은 1916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여, 1940년 니혼 대학[日本大學]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49년 극동 해운을 설립하였으며, 1954~1959년 국영 대한 해운 공사 사장을 지냈다. 1959년에는 한국 석유를 설립해 대표를 지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부터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결의해야 하는 등 잠시 시련을 겪었지만, 이내 해제되었다. 박정희 정권기 남궁련은 한국 정부의 수출 주도형 산업화·중공업화 정책에 발맞춰 유능한 기업가로 성장하였다.
해운업에 관여했던 남궁련은 조선 공업의 발전 가능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1968년에 민영화된 대한 조선 공사를 인수해, 1988년까지 사장·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 조선 공사 회장을 지내던 시절 대형 선박 수출에 앞장서 1972년~1973년 연속으로 은탑 산업 훈장, 금탑 산업 훈장을 수상했고, 1974년 ‘수출의 날’ 포장자로 선정되었다. 1980년대에 본인이 직접 정력적으로 해외를 순방하며 선박 수주를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노르웨이·핀란드 등에서 무역·경제 협력을 주도해 성사시켰다.
한국·노르웨이 경협회장과 대(對) 노르웨이 선박 건조에 대한 공로로 1984년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1급 기사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과 1980년대 세계적으로 장기화된 해운·조선업의 불황으로 인해 신조선 수주선이 회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선소들은 저가 수주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경영 수지 악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궁련은 오랜 시간 자신이 키워온 대한 조선 공사를 한진 그룹에 매각하였다.
한편 남궁련은 관료·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64년에는 경제 과학 심의회의 위촉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6년에는 금융 통화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에는 12월 유신 헌법에 의해 공포·조직된 헌법 기관인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종로구 대의원으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남궁련은 언론계에서도 활동해 1962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 일보』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2006년 2월 22일 사망하였다.
남궁련은 도자기·그림 등 예술품 감상에도 취미가 깊어 상당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2006년 사망 후 유족들이 그의 소장품 256건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자녀로 남궁호 메트로 신문 사장 등 4남 3녀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2년 은탑 산업 훈장, 1973년 금탑 산업 훈장을 수상하였다. 1984년 울 라이브 5세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1급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