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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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信圭 |
이칭/별칭 | 봉경(奉卿),죽촌(竹村),청숙(淸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91길 100-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향주 |
출생 시기/일시 | 1631년 - 박신규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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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박신규 증광시 진사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87년 - 박신규 졸 |
추모 시기/일시 | 1871년 - 박신규 청숙(淸肅) 시호 받음 |
묘소|단소 | 박신규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7-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밀양(密陽) |
대표 관직 | 호조판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봉경(奉卿), 호는 죽촌(竹村).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박문충(朴文沖)이고 할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된 박진원(朴震元)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박계영(朴啓榮)으로, 유명남(柳命男)의 딸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배필로 맞이하여 박진규(朴鎭圭)와 박신규(朴信圭)[1631~1687]를 낳았다. 박신규는 병조정랑 황수(黃瀡)의 딸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혼인하여 박성의(朴性義)·박명의(朴明義)·박행의(朴行義) 등 세 아들과 세 딸을 낳았으며, 측실(側室)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신규는 22세가 되던 해인 1652년(효종 3) 증광시에 응시하여 진사 2등 25위에 이름을 올렸고, 이로부터 8년 뒤인 1660년(현종 1) 식년시에 병과 10위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이후 전적·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함평 현감·호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뒤 전주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여 사헌부 지평·병조정랑·동부승지·형조판서 등을 지내며 숙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1681년(숙종 7) 아들 박성의가 현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귀양을 가게 되자 이에 연루되어 안변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김석주(金錫胄)의 간언으로 한성 판윤을 제수 받고 중앙으로 돌아왔으며, 1685년(숙종 11) 호조판서에 전보되었다. 친형제인 박진규와 함께 남인 측에 서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특히 박신규는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하는 청남(淸南)의 입장에 서 있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데, 부인 창원 황씨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묘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주변에 묘표·상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청숙(淸肅)이란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