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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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寧翁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묘소|단소 | 의령 옹주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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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왕족 |
성별 | 여 |
본관 | 전주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생몰년은 미상이다. 태조의 서녀로 어머니는 찬덕 주씨(贊德周氏)이다. 배우자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된 이덕시(李德時)[이개(李開)로 개명]의 아들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이다. 이등과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황(李宺)·이선(李宣)·이삼(李穼)·이효(李宯)이며, 딸들은 각각 진양 정씨 정소(鄭韶), 청도 김씨 군수(郡守) 김맹형(金孟衡), 신평 이씨 직장(直長) 이만생(李晩生)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의령 옹주(義寧翁主)는 비록 천출이기는 하나 태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등의 아버지 이개가 개국공신이기도 하였으므로 의령 옹주 부부는 태조와 왕실로부터 아낌과 보호를 받았다. 1400년(정종 2) 이등이 장군에 임명되자 그가 내료(內僚) 출신이라 하여 당시 장군방(將軍房)의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회좌례(會座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회좌례를 통해 적임 여부를 판단해야 새로 제수한 자들이 직무를 행할 수 있었기에, 이는 이등을 적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자 정종이 장군방을 혁파하였다.
1419년(세종 1)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은 딸을 이등의 아들 이선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후 이등이 가난하다 하여 사절하였는데, 세종은 이때 ‘이등의 아들 이선은 태조께서 사랑하시던 외손이요, 그 어미가 비록 천생이나 나의 누이이니, 나 역시 사랑하는 처지’라 하여 의령 옹주와 그 가족을 아끼는 뜻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평득방을 하옥시키기도 하였다.
[묘소]
무수골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1978년 건립된 ‘개성 이씨 선조 사적비(開城李氏先祖事蹟碑)’가 있는데, 이 사적비 뒤로 올라가면 계천위 이등의 묘역이 나온다. 묘역에는 상측과 하측에 두 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의 것이 이등의 묘이고, 아래가 의령 옹주의 묘이다. 의령 옹주의 묘는 묘표·상석·문인석 등의 옛 석물과 근래 세워진 향로석을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근래에 원형의 호석을 둘렀다. 묘표는 1면비로 전면에 ‘의령 옹주지묘(義寧翁主之墓)’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