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60 |
---|---|
한자 | 南宮墣記念碑 |
이칭/별칭 | 성균 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 기념비(成均博士盧隱南宮墣先生紀念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민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87년 - 남궁복 출생 |
---|---|
건립 시기/일시 | 1970년 - 남궁복 기념비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 남궁복 도봉 서원 중건 발의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 남궁복 사망 |
현 소재지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기념비 |
관련 인물 | 남궁복(南宮墣)|민태환(閔泰桓) |
재질 | 암석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도봉 서원 중건에 힘쓴 한학자 남궁복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
[건립 경위]
1970년 양주 향교 전교를 지낸 남궁복(南宮墣)[1887~1975]의 발의로 도봉 서원이 복설되어, 그 공을 기념하기 위해 남궁복 기념비를 세웠다. 남궁복의 아들인 남궁련이 당시 해운 공사 사장·극동 해운 사장·조선 공사 회장을 지내면서 도봉 서원 복원에 거액을 희사하였기 때문에 남궁복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다.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 서원의 건물 우측에 ‘성균 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 기념비(成均博士盧隱南宮墣先生紀念碑)’가 있다.
[형태]
기단 위의 비신(碑身)에 내용을 전각(篆刻)하였고, 비문의 내용 위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돌을 올려 장식하였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로 학문과 절의를 숭상하였다. 그러므로 군현(群賢)이 배출하였으며 서원을 창건하여 그 공덕을 존모선양(尊慕宣揚)하니 효가충국(孝家忠國)하는 정의(正義)와 교화 다 이에서 배양되었던 것이다. 이 도봉 서원은 정암 조선생과 우암 송선생을 배향한 곳이라. 사림으로서 추앙함이 태산과 북두와 같거늘 어찌 수호지절(守護之節)과 전례지모(展禮之慕) 이 엄정하지 아니하였으랴.
희(噫)라, 시이사천(時異事遷)하매 정성이 옛날과 달고 사회의 기풍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나 이에 감연(敢然)히 정도(正道)를 밝히려는 유지(有志)있으니 그는 곧 노은(蘆隱) 남궁공(南宮公) 복(墣)이시라. 공은 일찍 본 서원의 인근에서 생장 그 풍의(風儀)에 감화된바 컸고, 7세 시 촌숙(村塾)에서 수업 일진(日進)하였으며 이어 성균관에 응시 입재(入齋) 소정의 과정을 수료, 박사위(博士位)를 받았다. 이 뒤로 더욱 모현사업(慕賢事業)에 전념 유림의 의범(儀範)이 되었고 양주 향교의 전교(典校)를 역임 대성전의 수리에 손보(損補)한 바 많았다.
이 도봉 서원은 철폐 후에 설단전향(設壇奠香)하였더니 공의 발의로 재건을 추진하다가 대지(垈地)의 계쟁(係爭) 중 공이 병고(病故)로 자손에게 정중한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서거하니 어찌 일향(一鄕)의 실망이 아니었으랴. 공의 후예 그 뜻을 전념 거액의 사재(私財)를 희사, 본원의 재건을 계획할 새, 계쟁 중이었던 대지는 승(勝) 환원(還元) 이 자리에 갱신중건(更新重建)하니 산용수색(山容水色)이 자못 수려하고 화풍서운(和風瑞雲)이 감돌거늘 윤전(輪奠)의 웅건(雄建)함이어 도봉의 장기(壯氣)와 더불어 길이 빛나리로다.…
삼자(三子) 련(鍊)은 생활(生活) 다 준일(俊逸)하고 종손(從孫) 환(渙)과 일(溢)이 또한 은후(殷厚)하여 일문(一門)의 영화(榮華)다. 선대(先代)의 여경(餘慶)이라 할 것이다. 사림 제위(諸位) 그 전말을 내송(來誦)할 새 내 그 성의(盛意)에 감(感)하여 무사(蕪辭)를 정후(貞后)에 부처 이 뜻을 영전(永傳)하고자 하노라. 철학박사 전 충남대학교 총장 민태환(閔泰桓) 찬병서(撰幷書). 단기 4303년 4월 5일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
[현황]
1970년대에 세워진 이후 그대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남궁복 기념비를 통해 고종 대에 훼철된 도봉 서원의 사우(祠宇)와 유도문(由道門)이 중건된 경위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