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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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世輔夫婦墓碑 |
이칭/별칭 |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공 세보지묘(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世輔之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외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혜경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71년 - 김세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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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32년 6월 7일 - 김세보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82년 - 김세보 부부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서울 초안산 분묘군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외~노원구 월계동 산8-3 외 |
성격 | 묘비 |
관련 인물 | 김형(金泂)|이광여(李匡呂)|강세황(姜世晃)|신대우(申大羽) |
재질 | 오석(烏石) |
관리자 | 서울특별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의 서울 초안산 분묘군에 있는 조선 후기 김세보와 두 부인의 묘비.
[개설]
김세보(金世輔)[1671~1732]는 경주 출신으로 자는 자징(子徵)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추증된 김응룡(金應龍),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김승신(金承信), 아버지는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낸 김상현(金尙玹)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인 홍달선(洪達善)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이후 강음 이씨(江陰李氏)와 재혼하였다. 남양부 중군(中軍)으로 있을 때 군기(軍機)를 수리하고 군졸들을 사랑한 까닭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동교(東郊)의 초헌현(軺軒峴) 남향에 두 부인과 함께 묻혔다.
[건립 경위]
김세보와 두 부인 남양 홍씨, 강음 이씨의 묘비는 홍씨 소생 아들 김태정(金泰禎)의 셋째 아들인 김형(金泂)이 할아버지의 행적을 기리고자 1782년(정조 6)에 세웠다.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 일대에 걸쳐 있는 서울 초안산 분묘군 내의 월계로 북단 묘역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월계 근로 복지 아파트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약 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정현립(鄭顯立)과 정허농(鄭許農)의 묘가 있는데, 그 위쪽에 김세보와 두 부인의 합장 묘 및 묘비가 위치하고 있다.
[금석문]
김세보 부부 묘비 앞면에는 강세황(姜世晃)[1712~1791]이 예서체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공 세보지묘 숙부인 남양 홍씨 숙부인 강음 이씨 부(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世輔之墓 淑夫人南陽洪氏 淑夫人江陰李氏 祔)’라고 썼으며, 뒷면의 음기는 신대우(申大羽)[1735~1809]가 썼다.
묘갈명은 김세보의 손자 김동의 부탁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광여(李匡呂)[1720~1783]가 지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김세보의 가계를 간략히 소개한 후 계모와 이복형제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던 일화와 아버지를 여읜 후 죽을 때까지 비단옷을 입지 않았을 만큼 검소하였음을 소개하였다. 또한 손자 김형이 남양부에 갔다가 김세보의 중군 재직 시절 군졸들을 매우 아껴서 칭송받았으며 송덕비(頌德碑)도 건립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김세보의 자녀와 손자·손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고 있다.
[현황]
현재 김세보 부부 묘비는 서울 초안산 분묘군 내에 있는 묘소 앞에 그대로 세워져 있으며, 묘갈명의 찬자인 이광여의 문집 『이참봉집(李參奉集)』 권3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