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298
한자 朝鮮時代[東區]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이칭/별칭 조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무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2년 - 조선 왕조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까지 - 조선 왕조 끝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구역]

조선 초기에 대구[지금 대구광역시]는 현이었다. 조선시대에 지방행정단위를 읍의 규모와 군사적 지휘체계를 고려하여 부·목·군·현이라 나눈 것 가운데 제일 낮은 격이었다. 1403년(태조 3) 3월에 감무(監務)가 있었던 수성현(壽城縣)[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과 해안현(解顔縣)[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봉무동, 도동 일대]을 대구에 영속시켰다가 1404년 경주로 이속하였으며, 다시 1414년(태종 14)에 수성현, 해안현을 대구에 이속하였다. 조선시대에 수성현이나 해안현과 같이 속현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 때 주속관계에 놓인 속현과 달리 군현 안에서 구획의 명칭이었다. 해안현해안직촌(解顔直村)이라는 이름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해안현으로 부르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대구현은 1419년(세종 원년) 5월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000호를 군(郡) 승격의 기준으로 볼 때에 거민(居民) 1,200여 호와 인구 86,000여 구는 충분한 승격 사유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진관제(鎭管制)가 확립됨에 따라 대구진(大丘鎭)을 두게 되면서 대구군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 것은 대구 발전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 도호부로 승격된 것 자체가 그간 대구가 발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대구가 주진(主鎭)이 되면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읍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진관제하 소속 각 읍의 군사를 집합시키고 훈련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주진 소속의 군사를 번상군으로 서울로 올려보내는 등 인근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1592년(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은 여러 면에서 대구의 중요성을 눈에 띄게 한 사건이었다. 공산(公山)의 자락 아래인 성주의 팔거현에 군사지휘부가 있었듯이 공산의 곳곳에서 대구 인근의 임란 대응세력들이 활동하였다. 대구부사 등은 동화사를 임시 지휘소로 사용하였고 대구의 의병인 공산의진(公山義陣)부인사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종전 이후 가산산성을 수축하고 칠곡도호부를 두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역사적 경험에서이다.

대구 발전의 또 하나의 계기는 1601년(선조34) 경상감영의 설치이었다. 감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하게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행정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판관의 존치 여부는 감사의 부사 겸임상황에 따라 변화하였다. 대구 읍사(邑司) 안에는 경상도 관찰사의 감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므로 도 전체를 총괄하기 위하여 설치된 행정조직과 도호부 자체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된 행정조직 그리고 대구진관의 군사행정 조직 등 삼원적(三元的)인 행정체계가 수립되어 있었다. 감영, 부아(府衙) 및 진영(鎭營)이었다. 대구는 감사의 기능 조정 및 감사와 부사라는 중요한 두 기구의 존치에 따른 재정 부담 그리고 대구 통치체계의 정비 등의 문제들이 맞물려 제도를 고치거나 혹은 행정구역의 조정 등을 계속하였다.

조선시대의 군현 아래의 행정체계에는 면리제(面里制)가 있었다. 군현을 몇 개의 면으로 나누고 면 아래에 리를 두는 것이었다. 조선후기 대구부의 면은 34개이었다. 한 면에는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16개의 동리가 있었다. 면리제가 전개되면서 종전의 수성현, 해안현, 하빈현, 화원현(花園縣), 풍각현(豐角縣)이 면리제로 편성되었다. 화원현과 풍각현은 1685년(숙종 11)에 내속하였는데 그것은 감영을 두면서 재정수요가 급증하자 취해진 조처였다. 이보다 앞서 감영을 설치한 해에 하양과 경산을 대구에 합속시켰다가 1607년(선종 40)에 되돌린 일이 있으나 그것은 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현 사정 때문에 취한 임시조처였다.

면의 이름은 동서남북의 방위명과 고유명을 함께 사용하였다. 방위명 역시 동상면(東上面), 동중면(東中面), 동하면(東下面)과 같이 세분되었다. 월배, 조암, 인흥, 감물천과 같은 면에서는 혹 방(坊)으로 표기하였다. 면의 이름 안에 촌과 부(部)를 사용하듯이 동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리를 사용하지만 촌 혹은 동을 그대로 사용하여 불로동, 봉무촌이라 하였다. 수성현 지역의 면은 면 이름 앞에 수(守)를 붙였으며 해안현 지역의 면은 해(解)를 붙였다.

지금의 동구를 기준으로 조선시대의 행정편제를 살펴보면 동상면(東上面)의 가암리(駕巖里), 신천리(新川里)와 수북면(守北面)의 금정리(琴汀里), 효목리(孝睦里)가 해당된다. 그리고 해안현이 나뉘어 편성된 해서부면(解西部面), 해동촌면(解東村面), 해북촌면(解北村面), 해서촌면(解西村面)이 해당된다. 해서부면에는 일지동리(一枝同里), 상향리(上香里), 지저리(枝底里), 입석리(立石里), 지당리(池塘里), 현상리(縣上里), 불로동(不老洞), 구성촌(九成村), 단산리(丹山里), 봉무촌(鳳舞村), 노은동(老隱洞) 등 11개 동이 있다. 해동촌면에는 도리동(道理洞), 연천리(蓮川里), 도신리(道新里), 검사리(黔沙里), 격양리(擊壤里), 대암리(臺巖里), 칠동(漆洞), 상동(上洞), 부동(釜洞), 구명동(九明洞), 호암동(湖巖洞), 신평리(新坪里), 신덕리(新德里) 등 13개 동이 있다.

해북촌면에는 내동리(內洞里), 신기리(新基里), 미대리(美垈里), 용전리(龍田里), 구암리(龜巖里), 중산리(中山里), 중심리(中心里), 백안리(百安里), 진정리(眞亭里), 양방리(良方里), 능성리(能城里), 인산리(仁山里), 당동리(唐洞里), 평리(坪里), 광리(廣里) 등 15개 동이 있다. 해서촌면에는 상리(上里), 덕산리(德山里), 복초리(復初里), 대성리(大成里), 송정리(松亭里), 택리(宅里), 중리(中里), 대거리(大渠里), 연암리(燕巖里), 용담리(龍潭里), 삼산리(三山里), 용진리(龍津里), 대곡리(大谷里), 지묘리(智竗里), 신기리(新基里), 연경리(硏經里) 등 16개 동이 있다. 해서촌면의 경우는 일부가 동구로 편제되었다. 아울러 하양현의 안심면과 경산의 북면 일부가 해당된다. 안심면매여동(梅余洞), 각산동(角山洞), 서동(西洞), 내동(內洞), 송전동(松田洞), 괴전동(槐田洞)과 경산의 북면에 속했던 내곡리(內谷里), 사복암리(司卜岩里), 금강촌(琴江村), 오례촌(五禮村), 마여리(馬余里), 율상리(栗上里), 율하리(栗下里) 등이 해당된다.

[자연환경]

산천과 같은 자연은 행정구역의 경계이면서 삶의 환경이었다, 금호강(琴湖江), 신천(新川), 공산의 여러 줄기는 동구 지역 각 동리들을 구획하는 한편 삶의 조건이었다. 금호강은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의 동쪽으로부터 흘러 들어 북쪽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흐르면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아울러 신천이 남쪽으로부터 발원하여 대구부 동쪽을 관통하여 북쪽 금호강으로 흘러 들었다. 하천은 교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장애물이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과 교통하기 위해 나루를 관리하거나 수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아 물을 관리하였다. 칠곡 방향으로는 금호진, 경산방향으로는 검정진(檢汀津), 신녕방향으로는 전탄(箭灘)에서 건넜다. 검정진은 뒤에 효목동으로 합해진 검정동에 있었으며 판교제(板橋堤)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의 아양교 부근인 것으로 보인다. 전탄은 왼쪽으로는 신천이 지나가고 오른쪽으로는 해안천이 흐른다는 설명이나 각종의 고지도에 표기된 것을 보면 무태진(無怠津)인 것으로 보인다.

대구를 둘러싸고는 그밖에 달천진(達川津), 동안진(東安津), 사문진(沙門津)이 있으며 성주 방향으로는 신장진(新場津)이 있었다. 각 나루에서는 봄과 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가을과 겨울에는 널다리 곧 나무다리[杠]를 설치하였다. 금호진과 검정진에서는 사용하는 배를 만들고 관리하기 위하여 자금을 마련하여 운용하였다. 금호진의 공적인 발로선(撥路船) 1척은 세를 받지 아니하였으나 각 나루의 농선(農船)과 같은 배들에게서는 선세를 받았다.

대구부의 동쪽을 흐르는 신천으로 인하여 때로는 도심에까지 수해를 입곤 하였다. 1778년(정조2) 판관 이서(李漵)는 승민(僧民)을 시켜 3,558보(步)에 걸쳐 방축하고 제방에 숲을 조성하였는데 수서면에서 동상면에 이르는 4㎞[10리] 규모의 것이었다. 신천 옆 동상면의 면민을 동원하여 관리하였는데 그를 위하여 토지와 자금을 마련하였다.

[경제산업]

대구광역시는 행정도시이면서 상업도시로서의 성격이 점차 확대되어 갔지만 동구 지역은 주로 농촌지역이었다. 동상면의 경우에는 도시 외곽이라 하지만 농촌지역에 해당되고 해동촌면과 해서부면은 역시 농업지대이었으며 그 가운데 하양 안심 일부 지역과 해북면과 해서촌면 등지는 산간지대라 하겠다. 그러나 그 지역 역시 제언(堤堰), 방보(防洑)와 같은 관개 수리시설이 확장되고 있었다. 19세기 대구 전체 제언의 수는 100여 곳이었는데 이 시기 해안의 북촌과 동촌 그리고 서부에서 11곳이나 증설되고 있다. 해서촌은 기존의 방보 2곳 이외에 3곳을 신설하고 있으며 해서부 역시 4곳을 증설하고 있다. 농토가 좁은 곳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농업지대이었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행정도시라는 점을 배경으로 대구의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대구의 유통권을 보면 서쪽과 남쪽은 각각 화원장과 하빈장이 읍장과 신장을 사이에 두고 유통망을 형성하였고 여기에 남쪽의 풍각장이 가세한 형태이었다. 동쪽과 북쪽은 읍장(邑場)[2일, 7일], 백안장(百安場)[3일, 8일], 신장(新場)[4일, 9일], 해안장[5일, 10일]이 순환적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읍장은 부내장(府內場)으로도 부르며 서상면에 있었고 신장은 동문밖 신동에 있다. 해안장은 해서부면에 있었고 백안장은 해북면에 있었다. 대구 도시의 읍장과 신장의 상품은 백안장과 해안장을 차례로 거치면서 유통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역적 특색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백안장과 해안장의 상품 역시 각각의 두 시장이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되면서 도시에서 생산된 생활용품 등의 수공업 제품과 함께 거래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해안장과 무척 가까운 곳인 경산의 반야월장[1일, 6일]과 하양 읍내장[4일, 9일]이 연결되었다. 넓게는 대구 도심을 중심으로 4방면의 장시가 하나의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거쳐 거래되던 왜화(倭貨)를 포함한 소금 등의 유통 상품이 확대되었고, 지역으로 보면 성주로부터 영천 경산 등지와 연결되는 상권을 형성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동구는 조선시대에 대구부, 하양, 경산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유통권 등을 살펴볼 때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문화]

조선시대의 유학은 가장 중심되는 문화이었다. 유학은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원리이고 기준이었다. 유학을 교육하고 유교가치관을 펼치는 주체는 다양하였다. 양반가족이나 문중은 물론이고 각종의 학교나 사우와 같은 기구 및 향약과 같은 사회조직이 있었다. 원우(院宇)라 불렀던 서원과 사우(祠宇)에서는 유교가치관에 터를 둔 선현봉사와 후학교육을 하였다. 사우에서도 선현에 대한 제향과 함께 교육을 하는 곳이 있었다. 해서촌 지묘리의 표충사는 ‘표충서원’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해동촌 도동의 백원서원(百源書院) 역시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곧 사우이었다. 그밖에 해서부 현상리의 유호사(柳湖祠), 해북촌 백안리의 청백사(淸白祠), 해서촌 지묘리의 평천사(平川祠) 그리고 해서부 지저리의 계림사(桂林祠)가 있었다. 이러한 원우의 확산은 유학교육과 유교의례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의 유교가치관의 보급 정도를 말해준다. 아울러 봉사자들은 자신들과 혈연이나 지연 혹은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들 봉사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이들 봉사자들이 학문적 성취를 내세우면서 향론의 중심세력이 된 것이었다. 아울러 이들 상호 간의 혈연관계를 보면 족세(族勢)가 강한 성씨를 중심으로 하는 동족마을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마을에서 향약을 시행하였다. 향약은 유교가치관을 널리 알리고 그 질서가 관통하는 향촌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경제적인 상호부조를 약문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해북촌의 부인동동약은 중산리와 중심리에서 시행한 것이었다. 퇴계계열의 향약이 가치관의 준수를 강하게 내세우고 있음에 반하여 이 향약은 부세에 대한 공동 대응기구라 할 선공고(先公庫)와 상호부조를 실천할 휼빈고(卹貧庫)를 함께 운영하였음이 특징이었다.

공산은 조선시대 불교문화가 전승되고 꽃피우던 곳이었다. 동화사파계사 등의 중요 사찰은 물론 숱한 암자가 있어서, 불교 건축, 회화, 공예 등 각 분야의 불교문화가 생산되고 전승되던 곳이었다. 동화사의 대웅전이나 파계사의 원통전과 같은 건축예술은 물론이고 특히 동화사사명당 유정 진영(泗溟堂 惟政 眞影)이나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 등 각종의 불화는 이 지역의 불화가 조선시대 불화 전통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 사찰과 마찬가지로 각종의 공납물품과 노동력을 부담하였기에 그를 피하기 위하여 파계사처럼 왕실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선정하여 의송처(宜松處)로 삼는다든가 금산이나 봉산을 설정하여 관리하였다. 공산수릉봉산계표석(綏陵封山界標石)수릉향탄금계표석(綏陵香炭禁界標石)은 19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수릉(綏陵)의 향탄을 공급할 봉산으로 정해졌음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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