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17
한자 改新敎[達城郡]
영어공식명칭 Protestant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엄진성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는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를 일컫는 말로, 신교(新敎)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개신교는 1885년(고종 22)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정식으로 선교 사업이 시작됨으로써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 1887년 최초로 장로교의 새문안 교회가 창립되었으며, 이어 10월에는 감리교의 정동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개신교 교회는 부산·대구·평양·의주 등지로 확대되어 전국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들은 선교뿐만 아니라, 교육·의료·사회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특히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받자, 자주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직접·간접으로 협조하였으며, 3·1 운동 때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의 만행을 외국에 알려 여론화하는 등 우리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국에 선교한 개신교의 외국 선교부로는 미국 남북 양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남북 양 감리교 선교부 및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등이 있었다.

[대구 및 경상북도 지역의 선교 역사]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기독교 전래는 부산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베어드[Rev. Willam M. Baird, 배위량]의 대구 방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93년 4월 22일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온 베어드 선교사는 3일간의 대구 방문을 통하여 많은 서적을 배포하는 등 포교 활동을 하였다. 대구가 인구가 많고 경상도 교통의 요충지임을 파악한 베어드는 선교 기지로서 대구를 주목하였다. 이후 1896년 1월 대구를 방문한 베어드는 남문안에 위치한 정완식의 집을 구입하고 이를 수리한 후 4월에 가족과 함께 이사 왔다. 그러나 1896년 10월 베어드 목사는 서울 지역 교육 담당 고문이 되어 대구를 떠나게 되었고, 대구의 선교는 처남인 아담스[Rev. James. E Adams, 안의와(安義窩)] 선교사가 대신 맡게 되었다.

1897년 11월 대구로 부임해 온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비로소 대구·경상북도 지역 최초의 교회가 모습을 갖추어 갔다. 처음 교회 이름은 대구읍 교회, 성내 교회, 남문내 교회[현 제일 교회]로 불렀다. 그리고 1897년 성탄절에 장의사로 의료 선교사 존슨[Dr. W. O. Johnson]과 그의 부인[Edith Parker]이 아담스 가족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899년 5월 1일에 선교사 브루엔[Hernry Munro Bruen, 부해리]이 대구 선교사로 임명받게 됨으로써 대구에 공식적인 선교 지부가 설립되었다. 1899년 11월에는 선교사 사이드보담(Sidebotham)[사보담(史普覃)] 부부가 대구로 와서 선교 활동에 동참하였고, 1899년 대구 선교 지부가 공식적으로 개설되어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남문내 교회는 아담스 선교사와 제중원[현 동산 병원의 전신]을 세운 존슨 의사 그리고 여러 교인들의 활동과 더불어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다. 1907년경의 통계를 보면 교인이 800명 정도로 급증하였다. 이로 인해 보다 넓은 교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1907년 이근배, 이영민, 정인구 등의 교인을 중심으로 건축 위원을 조직하고, 성도들의 헌금을 기반으로 1908년 두 번째 교회를 완공하였다. 당시 남문내 교회의 교인들은 대구 읍내뿐 아니라 주변의 칠곡이나 경산, 달성군에서도 출석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각 지역에 독립 교회를 건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조암 교회[현 월배 교회]가 달성군 지역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다. 월배 교회는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아담스 목사는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대구·경상북도 지역에 사월 교회[경산] 등 수십 개의 교회와 희도 학교, 계성 학교 등의 설립을 주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에 1935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경상북도 노회는 아담스 선교사의 활동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담스 선교사와 더불어 활발한 활동을 한 선교사는 부해리[1874~1957]와 그의 부인 부마태[Martha Scott Bruen]였다. 아담스 선교사의 후임으로 활동한 부해리는 부마태와 함께 신명 여자 소학교와 신명 학교를 설립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부터 1941년까지 42년간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당시 아담스 선교사는 경상북도의 동쪽 지방을 맡아 활동하였고, 부해리 선교사는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김호준 조사와 함께 경상북도의 서북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부해리는 주로 선산, 김천, 칠곡, 달성, 고령, 상주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여 이 지역의 교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외에 맹의와[Rev. E.F.McFarland] 선교사와 어도만 선교사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맹의와 선교사는 김호준, 서성오 조사와 함께 고령, 경주, 영일 등지를 담당하였고, 어도만 선교사는 김성삼 조사와 함께 군위, 의성, 선산 지방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당시 경상북도 지역의 선교 활동에서 중심 역할을 한 기관 가운데 동산 병원의 전도회를 꼽을 수 있다. 동산 병원 2대 원장으로 취임한 플래쳐[Dr. A.G. Fletcher]는 경상북도 지역의 전도를 위하여 전도회를 조직하였다. 전도회에는 병원 직원 전체가 참여하였으며, 초대 회장에 플래쳐 원장, 부회장에 김재명 등이 일을 맡아 보았다. 전도회에는 박덕일 목사를 비롯하여 김충한, 정재문, 김원휘, 강신창 등 여러 목사들과 허일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전도와 교회 설립 활동을 전개하였다.

[달성 지역의 교회 성립]

1901년에서 1912년까지는 노회[Presbytery]가 성립되기 이전 시대였다. 이 당시에 교회의 설립자는 모두 외국인 선교사였다. 당시 달성군 지역에 설립된 교회로는 1905년의 현풍 하동 교회, 1907년 무등 교회, 1909년 신당 교회, 1910년 설화 교회가 있었다. 노회가 조직된 이후에 설립된 교회로는 1922년의 냉천 교회, 1922년의 우록 교회, 1924년의 달천 교회, 1926년의 오동 교회, 1927년의 안인 교회, 1928년의 가천 교회, 1922년의 가창 중앙 교회, 1922년의 주암 교회, 1933년의 신당 교회, 1935년의 도동 교회, 1952년의 삼산 교회, 1977년의 동곡 교회, 1956년의 남동 교회가 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김수원 전도사에 의해 건립된 교회로는 1924년 건립된 달성군 화원읍의 천내 교회, 1933년 건립된 달성군 옥포읍의 신당 교회 등이 있다. 달성군 현풍읍 원교리에는 1931년 원교 교회가 세워졌으며, 창립 당시 목사는 김상근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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