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58
한자 大邱 藝術- 黃金期 1920年代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현묵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예술인.

[1920년대 대구의 상황]

1800년대 후반 대구는 경상감영이 있기는 하였지만 남북 1㎞를 약간 넘는 작은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읍성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가톨릭교의 계산성당, 기독교의 대구제일교회, 그리고 제중원 등의 건립으로 새로운 개화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개화 지식인들은 자녀들을 성당 혹은 교회를 다니게 하고, 이어서 자신들이 세운 교남-계성-신명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개화 지식인들의 자녀 일부가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바로 그 세대가 새로운 교육을 받고 대구로 돌아와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예술활동을 전개한 것이 바로 1920년대였다.

1920년대는 일본이 3·1운동의 결과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일정 부분 자유와 권한을 넘겨주는 척하며, 교묘한 회유책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일시로나마 자유롭게 예술창작에 매진할 수 있었다. 대구에 국한되지 않고 서울로 진출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우리나라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음악에서 박태원, 박태준, 현제명, 김문보, 문학에서 백기만,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 윤복진, 미술에서 이상정, 서동진, 박명조, 이여성, 이인성, 이쾌대, 연극에서 홍해성 등이 바로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1920년대 대구의 예술인들]

박태원(朴泰元)[1897~1921]은 1916년 동생 박태준과 평양 숭실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연희전문 문학부를 다녔다. 이때 고향 친구인 이상화 시인과 하숙방을 같이 사용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합창단원이자 독창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서울 YMCA 음악회에 수차례 독창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박태원은 일본 영어학교에 유학하였다가 한 학기 만에 고향에 돌아와 투병하다가 1921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박태원계성학교 시절이나 유학 생활 중에도 틈틈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합창활동을 하고, 미국 민요와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거나 번안하였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클레멘타인」, 「올드 블랙 조」, 「스와니 강」 등이다.

박태준(朴泰俊)[1900~1986]은 박태원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형으로부터 서양음악의 기초를 배웠으며, 풍금을 배워 박태원이 성가대 지휘를 할 때 반주자 역할을 하였다. 박태준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박태원과 함께 191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박태원이 사망하던 1921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여서 「동무생각」, 「미풍」 등을 작곡한다. 그리고 193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교사 생활 중에 박태준은 작곡집 『박태준작곡집』과 동요집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을 발간하고, 대표작인 「오빠생각」도 작곡하였다. 「오빠생각」은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알려진다.

박태준이 유학을 가기 전에 이미 대구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인물이 세 명 있었다. 1924년 김태술, 1926년 현제명, 1927년 추애경이 바로 그들이다. 김태술은 박태원과 마찬가지로 대남소학교, 계성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현제명 역시 대남소학교, 계성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의 신흥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유학하였다.

현제명(玄濟明)[1902~1960]은 192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전임강사로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며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조선의 노래」로 동아일보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 후,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하여 초대이사장직을 수행하였으며, 1936년 미국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친일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한국인 최초의 바리톤 김문보[1900~195?]는 박태준과 동갑으로서 대구제일교회, 대남소학교, 계성학교를 거쳤다. 그러나 계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휘문의숙으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우에노 음악학교에 윤심덕, 한기주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924년 졸업 후 잠시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하다가, 1925년 같은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소프라노 요시자와 나오코[吉澤直子]와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일본과 한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성악 활동을 전개하였다.

백기만(白基萬)[1902~1969]은 1917년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종의 동인지 형식의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1923년 시 전문지 『금성』을 양주동과 함께 발행하고, 제3호에 이장희이상백을 끌어들여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던 이상화현진건 등과의 교우도 계속하였다. 또한 1929년부터는 거의 시를 쓰지 않는 대신 근대시 최초의 『조선시인선집』 편찬, 『개벽』, 『여명』 등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어린 시절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21세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1925년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난징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가장 아름다운 저항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진건(玄鎭健)[1900~1943]은 1920년 『개벽』에 「희생화(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貧妻)」[1921]로 이름을 알렸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 이상화, 나도향,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하였다가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현정건(玄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현진건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현진건의 절친인 이상화와 같은 날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장희(李章熙)[1900~1929]는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중학[京都中學]을 졸업하였다. 문단의 교우 관계는 양주동,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작품 활동은 1924년 『금성(金星)』 5월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등 5편의 시 작품과 톨스토이(Tolstoi)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하일소경(夏日小景)」, 「봄철의 바다」 등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윤복진(尹福鎭)[1907~1991]은 1925년 『어린이』지에 동요 「쪼각빗」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93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각 「동네의원」과 「스무 하룻밤」으로 당선하여 작가로서 지위를 공고히 한다. 윤복진의 동요는 작곡가 박태준에 의하여 거의 작곡이 된다, 그러나 윤복진이 월북하자 윤복진의 동요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뀌거나 윤석중, 이원수 등에 의하여 개사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동요가 「기러기」라 할 수 있다.

윤복진은 1907년생으로 박태준과 마찬가지로 대남소학교,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문과와 법정학부를 졸업하였다. 윤복진이인성은 다섯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죽마고우처럼 지냈다. 화가 이인성의 사진에는 윤복진과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은데, 그중에 윤복진 시의 시화를 그린 그림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도 있다.

대구 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李相定)[1896~1947]이다. 그는 1897년생으로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쿠가쿠인대학에서 미술과 상업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산, 경신, 계성, 신명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다가 조국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상정계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대구 최초로 서양화 미술도구를 도입하여 미술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서동진(徐東辰)[1900~1970]은 계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와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귀향한 후 서동진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서 무보수로 근무하면서 대구 최초의 아트센터라 할 수 있는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설립하였다.

박명조(朴命祚)[1906~1969]는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지만, 1923년에 자퇴하고 1923년 5월에 18살의 나이로 대구미술전람회에 이상정, 이여성 등과 함께 「초추(初秋)」 외 5점을 전시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박명조는 당시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듯 여겨지며, 1926년 9월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일본인 화가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亨] 화숙에 입문하여 미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인성(李仁星)[1912~1950]은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서동진(徐東辰)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이후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처음 입선한 뒤, 천재적인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1937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 선전까지 추천 작가로 참가하였다.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하여 1933~1935년의 제국미술원전, 1938년의 문부성미술전, 1933·1934년의 광풍회전에 잇달아 입선하였다. 그는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뎃생 능력은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쾌대(李快大)[1913~?]는 서울의 휘문고보 재학 중 1932년 일본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 유학하여 1938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니카텐[二科展]에 「운명」을 출품하여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하였다. 당시의 작품은 개성적인 표현 감각과 예민한 조형 의식으로 전형적인 한인 여인상이라는 주제에 치중되어 있었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진환, 최재덕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전쟁 직후, 서울에서 만들어진 북한 체제의 남조선미술동맹에 적극 가담하였던 끝에 인민 의용군으로 참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 수용소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남북 포로 교환 때 자의로 북한을 택하여 넘어갔다.

1921년 7월 18일 대구에서 서구 근대극 형식의 연극 공연이 있었다.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1921년 여름방학을 기하여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작품을 공연한 것이다. 참여한 인물들도 조명희, 홍난파, 김우진, 윤심덕, 홍해성 등 1920대 한국의 대표적 예술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때 김우진과 공동 연출 혹은 무대감독을 맡은 홍해성(洪海星)[1893~1957]은 바로 대구의 대남소학교, 계성학교 출신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직업 연출가이자 동시에 연극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그 당시 대중극 대부분을 연출하였다.

[시사점]

1920년대는 대구 예술의 황금시대였고, 대구는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20대 예술가들에 의한 황금시대였다. 대구의 예술가들이자, 당대 한국의 예술가들이었으며, 현대 한국예술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대구’라는 동일 지역, 동일한 근대교육, 그리고 동일한 종교를 바탕으로 서로 교류하며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예술 간의 장르 역시 넘나들었다.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미술과 문학이 서로 어우러졌다.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한 존중과 흠모가 있었고, 애정이 있었다. 이상화박태원의 목소리에 반해 혼자 동산에 올라 성악을 연습하는 장면이나 윤복진의 동시에 박태준이 작곡하고. 또 이인성이 삽화를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여 보면, 서로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3·1운동 거사 후 도피생활을 하던 이상화가 서울의 박태준 하숙집에서 도피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우정이 동지적 결속으로도 느껴진다.

이러한 1920년대 대구 예술인들의 소통과 교류는 현재 대구 예술계에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 장르와 장르를 뛰어넘는 교류와 소통이 각자의 예술 영역을 더욱 심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 폭을 넓혀 줄 것이며, 지역을 뛰어넘어 한국과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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