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씨
-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1630년경 영조 때에 청안현감을 지낸 정경연(鄭慶演)[1604~1666]이 산림이 우거진 이 땅에 들어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노모를 봉양하며 은거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정경연이 살던 곳을 노은고개[老隱峴], 또는 논고개[老峴]라 불렀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면의 이름도 노은현면(老隱峴面) 또는 노은면(老隱面)이라 하였다....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큰 골짜기가 있어 대곡(大谷), 또는 큰골이라 하였다. 대곡리의 중심이 되는 3개 마을 중 동산미(東山尾)는 최초의 마을인 엄동생골이 동산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대곡(原大谷)은 뒷산인 황술재를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게 흘러내리며 큰골을 형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맹동(孟洞)은 풍수적으로 매화자리에 속하는 길지였는...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뒤에 있는 행덕산(行德山)[447.7m]의 이름과 같이 덕(德)을 크게 행한 마을이라 하여 대덕리(大德里)라 하였다. 대덕리는 차령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일찍이 전주이씨, 문화유씨, 광산김씨가 들어와 살았다. 1757~1765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에 따르면 충원현 고장박리(古莊朴里...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대덕리에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고묘군. 노은면 면소재지에서 장호원 방면, 수상초등학교에서 대덕저수지 방향으로 들어서면 저수지를 지나 상원곡마을에 이른다. 대덕리 유적은 상원곡마을 동쪽 산자락과 능선, 뒤쪽의 밭에 위치한다. 소나무 군락지 뒤쪽 밭은 예로부터 고려 장터가 있었던 곳으로 전하며, 정남향으로 무덤의 입지로 좋은 위치이다....
-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에는 매산리, 수현리, 기동, 장승리 네 개 마을이 있었다. 이 중 큰 마을인 매산리와 수현리의 첫째 자와 둘째 자를 따서 매현리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매산리에는 조선 초기 좌찬성을 지낸 양성이씨 이승소의 후손들이 낙향하여 살았다. 매산리는 충주에서 목도로 이어지는 육로의 한 가운데...
-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매현리에 있는 조선 중기 송순의 처 문화유씨 열녀문. 송순의 처 문화유씨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네 살 난 외아들을 두었는데, 남편을 청나라 오랑캐에게 잃고 쫓기는 몸이 되자 어린 외아들을 몸종에게 맡기며 가문의 혈통을 잇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사(節死)하였다. 이에 문화유씨의 절개와 부덕을 기리고자...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학보 처 문화유씨 열녀 정려문. 충강공 이상급의 5대 손부인 문화유씨는 부군인 이학보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는 등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타계하자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이 끝난 후 문화유씨는 소복으로 갈아입고 26살의 나이로 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영조가 불...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문. 1716년(숙종 42)에 명정(命旌)된 문화인 유충건(柳忠健)과 아들 유시량(柳時亮), 손자 유송제(柳松齊)의 3대에 걸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이다. 유충건은 유몽정(柳夢鼎)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광해군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36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죽을 먹으며 시묘(侍墓)하다...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같은 성과 같은 본관을 갖는 세거 성씨.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이전 고대국가에서는 성씨는 왕족과 극히 일부 중앙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후삼국시대 성주, 장군, 촌주 등의 신분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지방 귀족 이...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열녀. 본관은 문화(文化). 남편은 송순(宋淳)이다. 송순 처 문화유씨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편을 청나라 병사에게 잃고 혼자 몸이 되었을 때 네 살 난 아들을 몸종에게 맡기면서 가문의 혈통을 잇도록 부탁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사했다. 송순 처 문화유씨의 정절과 부덕이 조정에 알려져 1640년(인조 18)에...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 속하는 법정리. 1898년(고종 35)에 발간된 『충청북도 각군읍지』 충주군조에 “충주군 노은면 마을 남쪽 안락골의 이름을 따서 안락리(安樂里)로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안락리라는 지명은 안락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안락리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 문화유씨 등이 일찍부터 들어와 세거하였다. 『여...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상지(常之). 학암(鶴巖) 유몽정(柳夢鼎)의 후손이다. 효우(孝友)의 근본이 하늘에 있는 것이니 부모가 하는 일이면 비록 어려운 일 일지라도 기어코 했으며, 싫어하는 일이면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을 얻으니 산신령에게 기도를 드리고 대변을 맛보아 가며 4개월 동안 지성으로 간호했다. 그래도...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는 조선 전기 사헌부감찰을 지낸 유용량과 부인 안동권씨 합장묘. 유용량은 문화유씨 하정공파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백곡(栢谷) 이다. 조부는 고양군수 증이조참판(高揚郡守贈吏曹參判) 유순행이며, 부친은 부제학 공조참판을 역임한 유희저(柳希渚), 모친은 정부인 죽산안씨이다. 유용량은 1495년(연산 1) 9월 23일에 출생하...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벽진이씨 종중 재실. 재실은 사당이나 묘소 옆에 지어 재계 및 제사 준비 등을 하는 곳이었다. 이상급[1571~1637]은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병자호란 강화 후 후금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국도 3호선을 타고 충주에서 장호원 방향으로 가다가 주덕오거리에서 오른쪽 지방...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열녀. 본관은 문화(文化). 남편은 통덕랑에 오른 이학보(李學普)이다. 이학보의 처 문화유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는 등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간병도 효험이 없이 48세로 남편 이학보가 별세했다. 이학보의 처 문화유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소복차림의 정좌한 자세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26...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 정문이란 정려(旌閭)라고도 하며,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대개 붉은 살을 두른 사방 한 칸 형식이나 문중 정려를 한 곳에 모아 여러 칸으로 만들거나 가옥의 출입구에 현판을 단 경우도 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건립되기...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는 산. 이병연(李秉延)이 편찬한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 주산은 충주에서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락리 안락골의 주산은 풍수지리형국의 주산(主山)이라서 붙어진 이름으로 안락골의 진산이 되고 있다.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 안락골(일명 안락동)과 신니면 화석리의...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촌락.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성씨집단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을 의미한다. 집성촌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7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적장자 중심의 상속제도의 변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 예학(禮學)의 발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