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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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山書院 |
영어공식명칭 | Insanseowon Confucian Academy |
이칭/별칭 | 오현서원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610년 - 인산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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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인산서원 훼철 |
원소재지 | 인산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155 |
성격 | 서원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인산서원(仁山書院)은 1610년(광해군 2) 아산 지역 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이른바 동방 오현(五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아산 지역 최초의 서원이었다. 후에 기준(奇遵), 이지함(李之菡), 홍가신(洪可臣), 이덕민(李德敏), 박지계(朴知誡) 등을 추배하였다. 기준은 1519년의 기묘사화로 아산에 유배되어 1년 미만을 머물렀으며 1668년 추배되었다. 이지함은 1578년에 아산현감으로 재임 중 사망하였으며 역시 1668년 배향되었다. 홍가신은 아산 출신 문신으로 1596년 홍주목사 재임 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여 청난공신 1등이 되었고, 아산 출신 인물로는 최초로 사후 4년 만인 1619년 추배되었다. 이덕민은 아산 출신의 학자로 1668년 배향되었고, 박지계는 광해군이 즉위하자 신창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문신으로 1668년에 추배되었다.
[위치]
인산서원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있었다. 마을은 인산서원이 있던 곳이어서 서원골이라 부른다. 국도 39호선[아산로]의 염치교차로에서 서쪽 지방도 624호선[현대로]으로 접어들어 2㎞ 지점의 와천 서원교 앞에서 오른쪽 와천 제방의 마을길로 1㎞ 가면 인산서원 터에 다다른다.
[변천]
인산서원의 명칭이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과 『서원가고(書院可攷)』에는 ‘오현서원(五賢書院)’이라고 되어 있으나 『동국원우록(東國院宇錄)』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산서원(仁山書院)’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열읍원우사적』에 실려 있는 「아산현서원사실성책(牙山縣書院事實成冊)」이 1759년에 작성된 점에 비추어 볼 때, 원래 ‘오현서원’이라 하였는데 어느 시기부터 지명을 따라 ‘인산서원’이라 부르게 된 듯하다. 『열읍원우사적』에 실려 있는 「충청도아산현서원사적중소루자고실성책(忠淸道牙山縣書院事蹟中疎漏者考實成冊)」[1763]을 보면 당시 오현서원이 있는 소지명(小地名)이 바로 ‘아산현 소북면 인산리(牙山縣小北面仁山里)’라고 적혀 있고, 『서원가고』에서도 인산서원이 아산현의 북쪽 인산리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신정아주지』에 의하면 원래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기 전부터 아산현의 많은 선비들이 여러 번 종사를 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윤허를 받지 못하자, 사적으로 논의하여 오현을 모시는 서원을 세워 제사하였는데, 광해군 때에 이르러 오현을 문묘에 종사한 후에도 그대로 두고 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아 아산 지역에서 오현의 제향은 1610년 이전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717년(숙종 43) 숙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이 고을의 유생들이 인산서원의 사액을 청했으나 사액을 받지는 못하였다. 인산서원의 사액 여부에 대해서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미사액으로 되어 있으나 『동국원우록』에는 사액서원으로 적혀 있는데, 사액된 시기가 명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국원우록』의 착오로 보인다.
『신정아주지』에 의하면 조선 말기 인산서원의 운영은 춘추의 제향 시 관아에서 제물을 봉진했으며, 어염은 중방포(中方浦)를 왕래하는 선척에서 징수한 부세로 차응하였다. 인산서원에 소속되었던 인원으로는 동재 재임으로 도유사 1원, 장의 2원, 색장 2원을 사대부로 추천하여 정하였고, 서재에는 당장 2인을 원생으로 차정하여 임명하였다. 그 외 수복 1명 동·서재 고직 1명, 원생 15명, 원보직 30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인산서원의 물적 토대는 복호가 1결이었으며, 원안(院案)에 등재되어 있는 원위전토가 있었고, 좌우의 시장(柴場)과 과목(果木), 금양(禁養) 등의 절목이 완문으로 되어 있었다.
인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형태]
인산서원이 있던 터를 보면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규모나 시설 등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황]
인산서원은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였고 터만 남아 있다. 인산서원 터에는 지형에 따라 토지를 몇 개의 단으로 나눈 흔적이 있으며, 축대 일부와 초석이 남아 있다. 서원 터는 주변을 철조망으로 둘러 보존하고 있으며 노송 몇 그루가 서 있다.
[의의와 평가]
인산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창건된 아산 지역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오현서원’이라고도 불렀다. 김굉필 등 오현은 아산 지역과는 직접적 연고가 없음에도 동방오현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기 1년 전에 서원을 세워 배향했다는 점은 아산 지역의 유림들이 자신들의 학통을 동방오현에서 찾고 동방오현의 문묘종사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분위기는 1634년의 온양 정퇴서원 건립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