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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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石浦 |
영어공식명칭 | Baekseok-po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병조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에 있던 포구.
[개설]
백석포(白石浦)는 아산만과 아산군 치소(治所)[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를 연결하는 주요 포구였다. 포구에 인접한 산꼭대기에 흰 돌[白石]이 있어서 이 산을 ‘백석산’이라고 불렀으며, 백석산 앞에 있던 포구도 산의 이름을 따서 ‘백석포’라 불렀다. 마을 이름 또한 ‘백석포리’이다. 백석포는 안성천을 건너 수원으로 연결되는 경로상의 포구였다[당시에 백석포 건너편은 수원에 속했다]. 백석포리는 조선 정조 때 수원 화성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부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 백석포가 아산과 수원을 잇는 경로상에 있던 포구임을 추정할 수 있다.
백석포에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해안까지 뻗어 곶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항구가 발달할 수 있었다.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항구 발달에 불리한데, 백석포처럼 낮은 구릉성 산지가 곶을 이루는 경우에는 배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기 때문에 항구 발달에 유리하다. 또한 영인산, 금산, 고룡산 등 인근에서는 높은 편에 속하는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주천]이 유입하여 안성천 본류와 합류하는 점도 또한 포구가 발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변천]
백석포는 일제강점기까지도 포구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근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점차 역할이 축소되다가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완성된 후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황]
백석포의 도하(渡河)[강을 건넘] 기능은 육로[아산만방조제]가 대신하게 되었으며, 마을 앞 갯벌은 모두 간척되어 폭 1㎞에 육박하는 간척평야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