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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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始顯 |
영어음역 | Gim Sihyeon |
이칭/별칭 | 윤화(潤和),하구(何求),학우(鶴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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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
성별 | 남 |
생년 | 1883년 |
몰년 | 1966년 |
본관 | 안동 |
대표경력 | 의열단 길림·북경 대표자|제2대 국회의원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화(潤和), 호는 하구(何求)·학우(鶴友)이다. 1883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시현은 1899년 서울에 올라가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수학하였으며, 1908년 이후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졸업 후 귀국한 김시현이 민족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한 시기는 1919년 3·1운동 무렵이다.
3·1운동과 관련하여 김시현은 상주헌병대에 두 달 정도 구금되었다가 1919년 5월 상해를 거쳐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김시현은 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장건상(張建相)·김원봉(金元鳳) 등과 접촉하면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김시현은 국내에 잠입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20년 9월 대구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감 후 바로 상해로 망명한 뒤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조선대표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상해로 돌아오면서부터 김시현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과 함께 7월 하순경부터 식민통치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대규모 폭탄운반(일명 김시현·황옥 사건)의 실행 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시현은 김지섭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사전 계획을 세운 뒤, 황옥을 포섭하여 유석현·장건상 등과 함께 이듬해 3월 초순경부터 실행에 들어갔으나 3월 15일 일행 13명과 함께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김시현은 10년형을 언도 받고 1929년 1월 29일 대구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형무소를 나온 김시현은 곧바로 만주로 향하였다. 만주에서 길림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시현은 1932년 남경에서 의열단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만들자 북경지부장을 맡아 생도 모집에 나섰다. 그리고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변절자를 처단하기 위해 나섰고, 마침내 군사간부학교 1기생이었던 한삭평을 처단하였다. 그 후 이 일로 체포되어 1935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 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렀다.
4년 7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김시현은 1939년 9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출감한 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가 4월에 다시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후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군자금 조달, 동지 규합, 무기 구입 등의 활동을 전개하던 김시현은 1944년 4월 북경에서 또 다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경성 헌병대에 감금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여섯 차례나 체포되고 15여 년 동안 옥고를 치렀던 김시현은 해방 직후부터 통일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는 해방 정국 초기에는 직접적인 정치 활동보다는 귀환 동포와 국외 동포를 원호하고 구제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충돌로 한반도 문제가 난관에 봉착하고,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이 어렵게 되자 직접 정치 활동에 나섰다.
1950년 5월 김시현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안동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는 6월 19일 개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오랫동안 열리지 못했다. 김시현은 남쪽으로 피신하지 못하여 인민군에 연행되어 서울성남호텔에 연금되기도 했다.
1952년 5월 김시현은 갑자기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전쟁의 참상과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현실을 통탄하며, 독재에 항거하여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동광장에서 한국전쟁 2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형을 언도받고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4·19의거로 대통령이 하야하자 석방되었다. 그 후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