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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330
한자 金兌一
영어음역 Gim Taeil
이칭/별칭 추백(秋伯),노주(蘆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37년연표보기
몰년 1702년연표보기
본관 예안
대표관직 사복시정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추백(秋伯), 호는 노주(蘆洲). 생부는 김단(金鍴)이며, 둘째아버지인 김곤(金錕)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사고처사(槎臯處士) 권극해(權克諧)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태일(金兌一, 1637~1702)은 장인인 권극해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15~16세에 이미 경서제자사(經書諸子史)를 읽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성균관학유가 되었다가 박사에 오르고, 1664년(현종 5) 성균관전적과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 흥덕현감이 되었다. 1666년(현종 7) 생모상과 1671년(현종 12) 양가(養家) 모친상을 당하여 상을 마친 뒤 문신 겸 선전관에 배명(拜命)되었다가 이듬해 황해도사가 되었다.

1672년 가을에는 부친상을 당하고, 1680년에는 생부상을 당하였다. 10여 년 동안 네 차례의 상을 당하여 다행히 생명은 보전했으나 두발이 진백(盡白)하였다. 1684년(숙종 10) 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으나 “부모가 계시지 않는지라 기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면서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진주목사에 임명되자 어쩔 수 없이 부임하여 해결되지 않은 장부와 문서를 정리하고 곧 돌아왔다가 1687년(숙종 13) 영해부사로 나아갔다.

1689년(숙종 15) 사헌부장령 등 5년간 여러 청직(淸職)을 역임하였다. 세강시강원보덕·사헌·사헌부집의·종부시정·장악원정·성균관사성·통례·영암군수 등을 거쳐 사복시정으로 있으면서 정변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나 이내 직첩(職帖)은 환수되었다. 이후 9년간 후진을 양성하면서 인근의 수많은 군자들과 도의(道義)를 사귀고 학술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만년에는 주자서(朱子書)에 몰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노주집(蘆洲集)』 5권 3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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