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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328
한자 金喆銖
영어음역 Gim Cheolsu
이칭/별칭 박수(璞銖),내극(乃克),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
출신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성별
생년 1822년연표보기
몰년 1887년연표보기
본관 의성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가계]

본관은 의성. 초명은 박수(璞銖), 자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아버지는 통덕랑 김재신(金在信)이고,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후손과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담(金淡)의 후손인 김장배(金章培)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철수(金喆銖)는 1822년 봉화 해저촌(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횡송(橫頌)하고 도송(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5세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나았으며, 9세에 의성김씨 시문집인 『문소세고(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벽자(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환하게 알았고, 할아버지 문천공(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암송했다.

1835년 음죽이씨(陰竹李氏)와 혼인하였다. 1849년에는 모친상을, 185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1858년(철종 9) 노원서실(魯園書室)을 지었고, 1864년(고종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867년 이헌기(李憲基)의 죄상을 지적했다.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충청도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된 뒤 명천(明川)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사면령이 내려져 괴산의 제월대를 거쳐 7월에 노원 자택으로 돌아왔다.

유배 생활 동안 도내 서원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 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주었으며, 훼철된 이산서원과 삼계서원으로 가서 사우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0년 뒤 왜구가 들어오고 사설(邪說)이 만연함을 개탄하며 이단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호를 미추자(味鄒子)라 하였다.

병풍에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篇)과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1876년에 삼계서원에서 천사(川社)의 부계장(副契長)으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1877년에 영남 유생들이 서원의 복설 상소를 올리고자 소수서원에 소청을 차렸을 때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1878년 봄에 학사공(學士公)의 『고식(故寔)』을 간행하였고, 추령의 선비들이 충재 권벌(權橃)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김철수를 소수(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노원집(魯園集)』 10권 5책이 전한다. 1879년(고종 16) 이후에 기자로부터 대산 이상정(李象靖)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전현들의 장갈문을 찬집하여 『동헌록(東憲錄)』을 지었고, 1884년(고종 21) 『역대성현전수편(歷代聖賢傳授編)』 1권을 편집하였다. 「수득록(隨得錄)」·「모년기사음청약기(某年記事陰晴略記)」·「노원만록(魯園謾錄)」 및 경사와 제자서 1,000여 권이 노원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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