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019
한자 端宗文化祭- 寧越- 傳統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환

[정의]

강원도 영월군을 대표하는 축제인 단종문화제와 축제 항목 중 하나인 영월 칡줄다리기의 전통.

[개설]

단종문화제(端宗文化祭)는 강원도 영월군을 대표하는 축제라 할 수 있다. 단종문화제영월 칡줄다리기가 축제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단종문화제의 역사와 단종문화제영월 칡줄다리기에 관련된 내용을 알아본다.

[단종의 영월 유배와 죽음]

단종(端宗)[1441~1457]은 1441년(세종 30)에 태어나 1450년(문종 1)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문종(文宗)[1414~1452]이 승하한 후 12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457년 6월 숙부인 세조(世祖)[1417~1468]에 의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왔다가 1457년 10월 24일 결국 죽임을 맞이한다. 단종은 비록 조선 시대 제6대 임금이었지만, 왕권 투쟁에 희생되어 비극적인 생애를 겪었다. 어떻게 보면 단종은 조선 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희생된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곧 ‘어린 왕’, ‘숙부의 섭정’, ‘영월 유배와 죽음’ 등으로 이어지는 생애가 전부이다.

[단종을 신(神)으로 모시는 영월군 사람들]

단종이 조선 시대 제6대 임금이었고 비운한 생애를 살았지만, 영월군 사람들은 단종을 마을 및 개인을 지켜 주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설화들을 통하여서 이를 증명하려 한다. 영월군에서 전승하는 설화는 한양[서울]을 출발하여 영월에 이르는 길과, 영월에서의 유배 생활과 죽음, 태백산(太白山)으로 오르는 길을 중심으로 전승한다. 그리고 마을 제의를 통하여서 신앙과 결부되어 있기도 하다. 곧 유배지였고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한 영월군 일대에서 지역의 신령(神靈), 지역신(地域神)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에 대한 제사가 민중들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지고, 더욱이 신으로 숭상받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종이 영월 군민들에 의하여 지역 신으로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신격화가 된 단종은 영월군에서 신화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수호 신격으로서 영월군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를 통제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앙화되어 제의로 표현된다. 따라서 단종을 신으로 모시는 영월군 사람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개인이나 마을은 물론 나라를 지켜 주는 지킴이로서, 영월군 주민들의 화합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구심점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충절의 고장 영월과 단종문화제]

영월군은 조선 시대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 온 곳이자, 죽임을 당한 곳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강원도의 정신’, ‘충절의 고장’ 등으로 인식되는 지역이다. 이와 같이 불린 이유는 단종 사망 후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지 말라!”라는 금기(禁忌)를 어기고,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단종의 시신을 거두고 암매장하였기 때문이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매장하였던 엄흥도의 행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충(忠)’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영월군이 충절의 고장이 된 것이다. 영월군에서는 매년 4월이면 단종의 넋을 기리는 전통 역사 축제인 단종문화제를 개최한다. 그리고 단종과 관련한 설화, 민속놀이, 민요 등과 같은 무형문화유산이 영월군 전역에서 전승한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청령포(淸泠浦), 관풍헌(觀風軒)자규루(子規樓), 장릉(莊陵) 등은 유형의 문화유산으로서 영월군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단종문화제는 1966년 영월군 종합개발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단종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출발한다. 장릉에서 올리던 단종제향(端宗祭享)이 ‘단종제’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불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된다. 그리고 1967년 제1회 단종제가 시작된다. 단종제 취지문에서는 단종 설화의 문화유적이 단종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축제가 영월의 역사를 창조하고, 향토 문화의 부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영월군에서 단종제가 개최되면서 단종 설화가 축제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영월군으로 유배 오고 죽임을 맞이한 단종을 축제의 중심에 두고 단종 관련 다양한 설화, 민속놀이 등을 차용하여서 단종문화제의 축제 항목을 만들었다. 이는 단종문화제단종문화제 고유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과는 차별적인 지역적 특성도 가지고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영월군 정월대보름 행사였던 줄다리기]

영월군에서 매년 4월 말에 개최하는 지역 축제인 단종문화제 행사 항목에 ‘영월 칡줄다리기’가 포함되어 있다. 영월읍에서 줄다리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1934년 3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영월군에서 줄다리기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후반인 1936년까지 영월읍에 소재하던 경찰서 앞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영월군에서는 현재 단종문화제 행사 항목으로 개최하는 영월 칡줄다리기단종 복위 이후인 1700년대부터 시작해서 1937년과 1940년 사이까지 이어지다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읍 관내에서 이루어진 줄다리기가 단종 복위와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영월 칡줄다리기가 1967년부터 단종문화제 행사 항목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단종 또는 단종 복위와 연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줄다리기는 1936년 『동아일보』 기사를 통하여서 영월읍에서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놀이였음이 확인된다. 이는 1967년 무렵 영월 칡줄다리기를 복원하여 연행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곧 영월읍에서 이루어진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 서낭당에서 ‘당고사[서낭제]’를 지낸 뒤 뒤풀이 성격으로 연행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줄다리기를 연행한 목적은 풍농(豐農)을 기원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을 것이다. 본래 영월읍에서 이루어졌던 줄다리기는 영월읍 관내의 서낭당에서 서낭제를 지내고, 영월읍 주민들의 무사 안녕과 지역 화합, 풍농 등을 기원할 목적으로 거행되었던 민속놀이인 것이다.

다만 영월읍의 서낭당이 태백산 산신으로 신격화된 단종을 모시고 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중단된 영월읍 줄다리기가 단종문화제의 주요 행사 항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영월 칡줄다리기단종 복위와 관련 있고, 한식(寒食)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함께 형성한 것이다. 단종 복위에 대한 염원과 흠모 및 신격화 작업의 의지를 놀이로 승화하려는 영월군 사람들의 의지를 영월 칡줄다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종문화제 축제 항목으로서의 영월 칡줄다리기]

1967년 단종문화제 행사 항목의 일환으로 영월 칡줄다리기가 복원된다. 영월군에서 전승하는 설화 가운데 단종 복위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로 인해 영월 칡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단종 복위를 꼭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친구와 어린 단종보다는 세조가 조선을 통치하여야 한다는 두 친구 간의 갈등을 줄다리기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또한 영월 칡줄다리기가 24절기 가운데 한식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이는 단종제향이 한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무렵 영월읍 관내에서 줄다리기를 연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항일 감정 고취를 문제 삼아 중단되었다가 1967년 제1회 단종제가 개최되면서 소규모의 민속 행사로 재현되었다. 이후 1970년 제4회 단종제부터 대규모의 칡줄다리기로 발전되었다. 영월 칡줄다리기는 1984년 강원도민속경연대회[현 강원도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였고, 1988년 영월에서 개최한 제6회 강원도민속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단종문화제 행사 가운데 주요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영월 칡줄다리기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칡줄의 준비와 경비, 인원 등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격년제로 진행되다가 1993년 제27회 단종문화제부터는 매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1983년까지는 ‘줄다리기’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85년부터 ‘칡줄다리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월 칡줄다리기 장소와 주관 단체]

영월 칡줄다리기는 복원 초창기에 과 짚을 섞어서 줄을 제작하였으나, 점차 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초반부터는 만으로 줄을 제작하였다. 따라서 1985년부터 줄다리기 명칭도 ‘칡줄다리기’로 바뀌었으며, 1988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칡줄다리기’라는 명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영월읍 주민들 가운데 영월 칡줄다리기를 복원하던 초창기에는 줄의 모양이 디딜방아와 유사하다고 하여서 ‘방아다리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36년에 있었던 영월읍 줄다리기는 영월읍 중심부인 영월경찰서 앞에서 진행되었다. 1967년 복원 당시에 영월 칡줄다리기가 어디에서 개최되었는지는 직접 확인할 수 없으며, 1970년에도 영월경찰서 앞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71년에는 동강(東江) 백사장,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영월공업고등학교, 1991년과 1992년에는 영월초등학교에서도 영월 칡줄다리기가 연행되었다. 1993년에는 영월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었으며, 1995년부터 현재까지는 동강 둔치에서 거행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동강을 기점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영월읍 주민들이 스스로 진행하던 영월읍 줄다리기는 단종문화제 주요 행사가 되면서 영월군, 영월읍 농촌지도소[현 영월군농업기술센터], 새영월로타리클럽, 금강로타리클럽 등이 맡아서 진행하다가 1997년부터 2019년까지 청년회의소에서 주관하여 개최하였다. 그리고 2019년에는 ‘영월칡줄다리기보존회’가 결성되었다.

[영월 칡줄다리기에서의 칡줄 제작]

영월 칡줄다리기에서 쓰이는 줄은 암줄과 수줄로 구성된 쌍줄 형태를 하고 있다. 암줄과 수줄은 ‘용머리’라 부르는 둥근 고리 모양의 머리[줄 머리] 부분이 약간 다를 뿐이다. 둥근 형태이지만 수줄의 용머리를 좀 더 좁고 길쭉한 형태로 만들어 암줄 머리에 삽입한 후 ‘용두목’으로 결합하기 쉽게 만든다. 칡줄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예전에는 20일 이상 걸렸으나, 현재는 칡줄의 규모가 축소되고, 새로운 술비통이 제작되어 약 15일 정도 걸린다.

칡줄 고사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채취한 을 풀어 놓고, 술비통을 이용하여 칡줄을 제작한다. 예전에는 칡줄의 총 길이가 약 40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길이 약 30m로 축소되었다. 줄이 축소된 이유는 비용 문제도 있지만 길이가 길면 칡줄이 잘 끊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월의 칡줄 제작에 사용되는 기본 줄은 몸줄[대줄]과 종줄[소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줄은 영월 칡줄다리기의 기본 줄로서 술비통에 20여 개의 을 묶고, 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계속 이어서 꼬은 후 풀리지 않도록 양쪽을 묶어 한 줄의 반쪽을, 같은 방법으로 한 줄의 다른 반쪽을 제작한다. 이후 반쪽짜리 두 개의 줄을 한 사람씩 잡고, 다른 한 사람이 술비통을 돌리면 한 줄의 칡줄이 완성된다. 한 편에 소요되는 몸줄은 24개이며, 두 편에 48개의 몸줄이 필요하다. 종줄[소줄]은 몸줄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며, 종줄 한 줄을 만들 때에 5~6개 정도의 칡가닥을 사용한다. 한 편에 소요되는 종줄은 13개이며, 두 편에 26개의 종줄이 필요하다.

몸줄과 종줄이 완성되면 용두를 제작한다. 암줄은 용두의 줄머리 직경이 3m이며, 원형이 되게 만든다. 수줄은 크기가 약간 작은 2.7m의 타원형 고리로 제작한다. 직경 5㎝로 만든 새끼줄을 용두에서 몸통 쪽으로 3m 정도 편장이 서는 위치까지 감는다. 이렇게 하면 암수 줄의 굵기는 대략 50㎝이고, 길이는 25m가 되다. 용두 제작이 완료되면 종줄을 이용하여 암수 줄에 24개의 몸줄을 묶는 기줄을 제작한다. 종줄을 1m 간격으로 30매듭 정도 묶고, 묶은 끈은 1.5m 정도 되게 하는데 줄다리기를 할 때 줄꾼이 손으로 잡고 당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월 칡줄다리기 행렬과 진행]

영월 칡줄다리기에서의 칡줄 행렬은 동편과 서편이 동일하며, 각 편은 기수, 질라잡이와 포수, 칡줄, 축관, 제관, 집사[동편에만 있음], 풍물패 순으로 관풍헌으로 출발한다. 이때 줄 위에 있는 편장이 ‘영차영차’ 구령을 선창하면 부편장이 복창을 하고, 줄꾼 모두가 합창을 한다. 암줄과 수줄은 영월읍 시가지 중간인 관풍헌 앞에서 만나 서로 실랑이를 하면서 줄 싸움을 한 후, 동편의 수줄이 먼저 동강 둔치로 향하고, 서편의 암줄이 뒤를 따른다. 길놀이 행진을 할 때 소리꾼이 선소리를 메기면 줄꾼들이 “영차영차”로 받는다.

동편 줄이 동강 둔치를 한 바퀴 돌아 줄을 오른편에 내려놓으면, 그 반대편에 5m 정도 떨어져서 암줄을 내려 놓는다. 양쪽 편장의 호령으로 서로 3m씩 옮겨서 용두가 결합되면 용두목을 끼운다. 이때 용두목이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는다. 칡줄 결합이 끝나면 유교식의 고사를 먼저 지낸다. 고사를 마친 뒤에는 세 번의 징소리와 함께 영월 칡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칡줄다리기의 승부는 정하여진 시간[15분] 동안 줄을 많이 끌어간 편이 이기는 것이다. 정하여진 시간 안이라도 10m 이상 끌려가면 심판장에 의하여 승패가 정하여진다.

한편 으로 만든 줄을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영월 칡줄다리기가 끝난 후 수줄을 서로 가져가려는 영월군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영월 칡줄다리기에서 이긴 편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도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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