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008
한자 義兵- 寧越 集結- 寧越 地域- 抗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엄찬호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군에서 결성한 호좌의진의 항일투쟁.

[의병의 결성]

한말 전기 의병 곧 을미의병기에 가장 큰 활약을 하였던 호좌의진은 강원도 영월 관풍헌에서 결성되었다. 호좌의진을 일으킨 유인석(柳麟錫)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행하여야 할 선비의 세 가지 처신, 곧 처변삼사를 제시하여 한말 의병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등 화서학파의 유생들이 머무는 곳에서는 어디나 의병이 일어났다.

한편 유인석은 주용규와 같이 제천 화산(花山)에 있는 이정규(李正奎)의 집에 머물면서 ‘처변삼사’ 중 국외 망명을 결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문인과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고 있으며 무기의 열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인석은 모든 의병들을 영월로 모이도록 하였다. 곧 이정규를 영남에 보내 서상열·이춘영을 부르게 하였고, 박정수(朴貞洙)를 영동으로 보내 안승우를 부르게 하여 모두 영월에서 집결하도록 조처하는 동시에 2월 3일 제천 군민에게 의병 참여를 호소하는 민회(民會)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관군에 의하여 민회가 해산되어 실패하자 이튿날 자신도 주용규와 함께 급히 주천·방림을 거쳐 영월로 들어갔다.

이처럼 영월에 모인 의병들은 유인석에게 의진을 이끌어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는 당시 유인석이 제천 장담에서 강학하던 여러 문인 사우들의 지도자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석은 당시 모친상을 당하여 근신 중인 점과 글 읽는 선비로서 군사를 지휘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지만, 당시 여러 장졸이 일의 경중을 들어 눈물로 호소하자 몇 번의 사양 끝에 청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을미의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1896년 2월 7일 유인석은 영월 관풍헌에서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에 올라 호좌의진이 결성되었다. 유인석은 상복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장소(將所)에 나아가 군무를 보면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책임을 나누어 맡기었다.

총대장 유인석(柳麟錫), 중군장 이춘영(李春永), 전군장 안승우(安承禹),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좌군장 원규상(元奎常), 우군장 안성해(安成海), 참모 박주순(朴冑淳), 사객(司客)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이조승(李肇承)·홍선표(洪璇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

[의병의 활약]

호좌의진은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엄숙한 군례를 행하며, 군사를 사열하면서 맹서하였으며, 그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이렇듯 의병진을 정비한 총대장 유인석은 2월 10일 영월을 떠나 다음날 제천을 무혈로 점거한 후 의진의 지휘부[대장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주용규가 작성한 「격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띄워 전 국민에게 궐기와 항전을 호소하였다.

이때 고종의 「애통조서(哀痛詔書)」가 비밀리에 당도하자 의병들은 하나같이 비분과 통탄이 골수에 사무쳐 토역복수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이렇듯 사기충천한 호좌의병은 충주성 공략을 앞에 두고 의병 포군에게 사로잡힌 친일인사인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였다.

[충주성 함락]

호좌의병은 1896년 2월 16일 원서에 진출하여 1박하고, 이튿날에 다리재[橋峙]를 넘어 강령에 이르렀다. 이때 북창나루를 얼음 위로 건너 곧바로 충주성을 공략하였는데,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으로 경군인 친위대 400여 명과 지방진위대 400여 명, 그리고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의 막강한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의병부대의 군세는 중군장 이춘영이 거느린 총을 소지한 포수 400명을 제외하고는 전승지 우기정(禹冀鼎)이 제천에서 소모하고, 이원하(李元厦)가 평창에서 동원한 민병 3,000명, 그리고 전승지 이호승(李鎬承)이 따로 거느린 500명의 민병 등이었다. 비록 1만 명을 헤아리는 민병 대열로써 그 군용(軍容)은 대단하였으나, 실은 관군과 일본군에 비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며, 적수공권의 촌민으로 적의 이목을 놀라게 하자는 시위 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승우의 말대로 “지팡이 끝에 기를 달고 적을 꾸짖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며, 그것은 또한 큰 의리를 후세에 펼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1896년 2월 17일 호좌의진은 제천 출신인 포수 서장석(徐長石)·엄팔용(嚴八龍) 등이 미리 충주성내에 잠입, 내통하여 지방군으로 하여금 성문을 미리 열어 놓고 달아나게 하여 의외로 큰 피해 없이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호좌의진은 충주 호암촌에 숨어있던 충주관찰사 김규식을 중군종사 오명춘(吳命春)이 잡아오자 장령(將令)에 따라 성문 밖에서 참수하고 김규식의 목을 장대 끝에 3일간 매달아 친일 관리들에게 경고하였다. 호좌의병의 충주성 점거는 을미의병에 있어 가장 먼저 크게 거둔 성과로서 이는 전국 의병들에게 적지않은 용기를 주었으며, 각지의 의병을 더욱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의 반격]

충주부를 점거한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라는 격문을 포고하여 모든 관리는 친일행위를 버리고, 의병항쟁을 후원하여 나라와 원수를 갚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병참기지인 수안보(水安堡)와 가흥에서 병력을 충원받고 2월 18일부터 충주 탈환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호좌의진의 대장소에서는 다음날 홍대석(洪大錫)·정익(鄭瀷)·황주목(黃疇穆) 등으로 하여금 의병을 이끌고 유주막·금관·탄금대·단월 등 충주 주위 9개소의 좁은 길목을 지키게 하여 침공하는 적을 막도록 하였다.

호좌의진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와중에 수안보의 일본 수비대는 마침내 1896년 2월 23일 충주성 서문 밖의 달천까지 공격하여 왔다. 이에 중군장 이춘영이 자진해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을 격퇴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군 병참기지인 수안보까지 급습하여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적탄에 피격되니 이춘영의 전사는 온 의병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유인석은 즉시 무인 출신인 전 삼화부사 이경기(李敬器)를 중군장에 임명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본군의 반격은 집요하여 3월 2일 또 한 차례의 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대장소의 참모 주용규가 남문의 문루(門樓)에 올라가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끝내 적의 유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이처럼 충주성을 사수하려 의병들의 처절한 피의 항쟁은 1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호좌의진은 날로 증강되는 일본군과 관군의 병력에 눌려 많은 희생자를 낸 채 결국 충주성을 포기하고 3월 5일에 동문을 빠져나와 신당·황강을 거쳐 마치를 넘고 청풍을 지나 3월 8일 제천으로 회군하였다.

[인근 의병의 결집]

호좌의진의 충주 입성이 인접 지역에 알려지자 의병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어 호좌의진은 중부지역의 의진을 규합한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때 전 장진부사 이문흠(李文欽)은 단양의 민병 130명을 모집하여 합세하였고, 장기의 전 현감 신태홍(申泰洪)은 호서지역의 군사 수백 명을 모병하여 합세하였으며, 또 춘천의병의 이소응도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지어 의병항쟁의 방책을 개진(開陳)하였다.

또 호좌의진이 제천에 유진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월 중순을 전후하여 문경 지방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포수부대, 원주의 한동직(韓東直)·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횡성의 이노명(李魯明) 의병부대가 합류하여 호좌의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문경의병장 이강년은 3월 12일 유인석과 사제의 의를 맺고 호좌의진에 합진하였는데 유인석은 3월 14일 이강년을 유격장으로 뽑아 산악전에 대비하였다.

또 원주 방면의 소모총독으로 군사를 모집하던 김사정(金思鼎)과 김사두(金思斗) 등이 3월 17일 원주 지방 군사들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왔으며 3월 27일에는 충청도 지역 소모장으로 나갔던 이범직이 10초(哨)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이어 4월에 들어서면서도 죽산·음성의병장 윤의덕(尹義德)과 손영국(孫永國)이 충주 금곶[金串]으로 진출하여 탄금대에 유진하였다가 제천으로 들어왔으며, 남한산성에서 남하하는 광주의병장 김태원(金泰元)의 군사와 원주의병장 이인영의 일부 병력이 의진에 합세하여 군세가 보강되었다.

[남한산성 전투와 후퇴]

의세가 보강되고 전열이 가다듬어 가고 있을 무렵에 남한산성의 의병진을 격파한 친위대와 강화진위대로 편성된 경병(京兵)부대는 참령 장기렴(張基濂)의 인솔로 그 기세가 상당하였다. 이때 관군 측은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권유하고 의병 측은 관군 측에게 의병에 협력하도록 종용하는 서신으로 여러 차례 협상이 시도되는 동안 고종의 선유조칙(宣諭詔勅)이 의병진에 전해지면서 결국 의병과 경군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드디어 장기렴의 경군은 5월 23일 남한강을 도하하여 황석촌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북창진(北倉津) 일대의 방어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이강년은 원규상 대신 새로이 우군장에 임명되어, 제천에 출두 중이었다. 그러므로 선봉 손영국(孫永國)·총독 김사정·좌군 이희두(李熙斗) 등이 군사를 지휘하여 경군에 대항하는 동시에 제천 본진에 경군의 공격을 급히 보고하였다.

5월 25일 중군장 안승우는 청국인 여국안(呂國安) 등과 함께 제천의 병력을 남산성에 집결시켜 경군의 남산 공격을 막았다. 경군은 세 차례나 공격을 거듭하였으나 그때마다 실패하였다. 그러나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 의병들의 주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유인석은 제천 본진에서 각 부대로 하여금 제천에서 물러나 학다리로 일단 집결하도록 하였다.

호좌의병은 잠시 제천 지곡에서 군진(軍陣)을 수습한 후 서북행(西北行)을 하는 6월 10일까지 남쪽으로 죽령을 넘어 풍기, 동쪽으로 소백산을 넘어 영춘·단양·수산, 서쪽으로 충주·음성, 북쪽으로는 원주 지역으로 행군하면서 잔여 의병을 수습하는 동시에 관군과 일본군과는 계속 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주위에는 경군과 친위대가 의병을 추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전진할 수 없게 되자 유인석은 의병을 일단 충주 은현으로 모이게 한 후 6월 10일 원주에 유진하였다.

이곳에서 유인석은 앞으로의 거취 문제를 놓고 휘하 장령들과 거듭 논의한 끝에 용맹한 무인들이 많은 서북[평안도] 지역을 무대로 장기적인 구국항쟁을 펴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서북대행군을 결행하게 된 호좌의병은 독자적 의병부대를 제외한 잔여 의병만으로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소토장 서상열은 선두에서 길을 열어 주고, 우군장 이강년은 후미에서 관군의 추격을 막아 주며 의병 대열은 영월·평창을 거쳐 6월 26일 정선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유인석은 7월 3일 고종에게 「서행시재정선상소(西行時在旌善上疏)」를 올려 서북행의 뜻과 선유사 정언조가 권유하는 의병 해산령에 따르지 못함을 밝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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