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암[왕바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224
한자 王巖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2년 - 「왕암[왕바위]」 『영덕군지』에 수록
관련 지명 왕암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권책|세조|단종|금성대군
모티프 유형 충신의 절의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에서 왕암과 권책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왕암[왕바위]」은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왕암에 대한 사물 전설이다. 또한 단종(端宗)[재위 1452~1455]이 폐위된 후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 충신 오봉(五峯) 권책(權策)[1444~?]에 대한 인물 전설이다. 단종이 죽은 후 권책왕암을 끌어안고 호곡(號哭)하였다 하며, 그 바위에 '왕암(王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왕암[왕바위]」은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내용]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뒷골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를 여섯 개의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데, 그 바위를 중심으로 마치 육신(六臣)이 엎드려 읍(揖)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이 바위를 왕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세조(世祖)[1417~1468]가 어린 조카 단종(端宗)[재위 1452~1455]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고, 오봉 권책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 오봉은 당시 나이 13세로 참형은 면하고, 영해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때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이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는데, 오봉은 죽령 고개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바위를 끌어안고 피맺힌 호곡을 하다가 여러 번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곤 하였다. 이후에도 오봉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암에 가서 분향하고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두문불출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오봉이 분을 못 이겨 읊은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분호천지노(憤號天地怒)[분하여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노하고]

원읍귀신비(寃泣鬼神悲)[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퍼한다]

1885년에 후손과 향인(鄕人)들이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여 그 바위에 ‘왕암’이란 두 글자를 새겼으며, 원근의 명현거유(名賢巨儒)들이 모여 주옥 같은 추모시를 읊었다. 오봉은 1847년에 종부(從父) 권자신(權自愼)[?~1456]과 함께 대봉서원(大峯書院)에 향사(享祀)되었으며, 뒷사람들이 두고두고 그의 충절을 흠모하였다. 대봉서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毁撤)되었다.

[모티프 분석]

「왕암[왕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충신의 절의'이다. 오봉 권책은 단종 폐위 후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영해에서 귀양살이를 한 충신이다. 단종이 죽은 후 후 권책이 끌어안고 호곡한 바위를 '왕바위'라 불렀으니, 이 바위는 곧 단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바위를 여섯 개의 바위가 둘러싸고 그 바위를 중심으로 육신이 엎드려 읍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설명은 왕바위의 신성성을 강조한다. 권책은 사육신은 아니지만, 설화에 나타난 일련의 행위와 시의 내용을 보아 충신의 절의(節義)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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