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78
한자 李祥和
영어공식명칭 Lee Sang hwa
이칭/별칭 이상화(李詳和)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이상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이상화 영해면 3.1독립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이상화 병곡면 3.1독립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53년연표보기 - 이상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이상화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상화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상화는 1871년(고종 8)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이다.

[활동 사항]

이상화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면·병곡면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은 기독교 측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과 지역 유지들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다. 특히 권태원이 3월 15일 병곡면 송천리의 정규하를 만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정규하는 "3월 18일 영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라고 제안하였다. 정규하의 제안에 권태원이 동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권태원정규하영해면 3.1독립운동을 위해 동지규합 및 태극기 제작에 나섰는데, 이상화는 영해면 묘곡리에서 정규하로부터 계획을 듣고, 마을 및 부근 기독교 신자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하였다. 이어 이상화는 당일 동생 이중식(李仲植)과 함께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가지고 영해 성내동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상화는 정규하·남계병(南啓炳)·남효직(南孝直) 등 2천 명의 군중과 함께 영해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상화와 군중들은 영해면에 있는 일제 침략기관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뿐만 아니라, 공립보통학교와 공립소학교 등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이상화는 성내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주재소·면사무소·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건물 파손 및 공문서 등 기물을 파괴하였다. 나아가 이상화정규하와 함께 오후 2시경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인접한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일제주재소·면사무소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상화는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이 끝난 3월 19일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붙잡혔다. 당시 영해에서 250명, 병곡에서 40명이 붙잡혀 총 290명이 구금되었다. 이상화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검사국을 거쳐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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