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31
한자 金爀東
영어공식명칭 Kim Hyeokdong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연표보기 - 김혁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혁동 영덕읍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 김혁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혁동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덕읍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지품면 기독교 영수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혁동은 1889년(고종 26)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이다.

[활동 사항]

김혁동은 1919년 당시 영덕군 지품면에서 기독교 영수(領袖)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덕읍 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세영(金世榮)이 김혁동강우근(姜佑根)에게 보내 만세운동을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강우근권태원(權泰源)과 협의하여 3월 18일 영덕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3월 16일 영양군의 이승구(李承玖)는 박윤규(朴潤奎)로부터 소식을 듣고 3월 18일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결의하였다. 김혁동은 3월 17일 이승구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권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일신보』를 통해 전국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후 김혁동 등은 영덕읍 내 교회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8일 김혁동강우근·강대열·이승구 등과 함께 영덕읍의 기독교 신자 50여 명을 이끌고 남석동 시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오후 2시경 김혁동과 군중들은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영덕읍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출동해 군중을 제지하면서 김혁동을 포함한 주도 인사 20여 명이 붙잡혔고,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등이 영덕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주도 인사들을 구출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경계활동 강화로 실패하였다. 김혁동은 일제에게 붙잡힌 후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혁동은 영덕 지역에서 기독교인로써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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