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06
한자 權正弼
영어공식명칭 Kwon Jeongpil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11월 29일연표보기 - 권정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권정필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권정필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9년 3월 20일연표보기 - 권정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권정필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권정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권정필(權正弼)[1884~1939]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병곡면 송천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를 비롯해 남여명(南汝明)·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 기독교 교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김세영과 기독교 교인들은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덕 지역의 토착 향반(鄕班)과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권정필도 거사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권정필을 비롯한 시위군중 3,000여 명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 모여 들었다. 권정필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권정필이 시위군중과 행진할 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일본 순사의 행동에 분노한 권정필 등은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이어서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학교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건물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훼손하고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오후 2시경 권정필과 시위대는 병곡면 병곡리로 가서 병곡면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정필과 군중들은 병곡주재소·병곡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平海)에서 증원된 일본 헌병 3명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희생을 염려한 정규하의 설득으로 해산하였다.

3월 19일에도 영해를 비롯해 병곡·창수·영덕·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파견되었다. 파견된 일본군들은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대 해산 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권정필도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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