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00
한자 許聖徒
영어공식명칭 Heo Seongdo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8월 28일연표보기 - 허성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허성도 대구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허성도 영풍교회 목사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4년 6월 4일연표보기 - 허성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허성도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허성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활동지 서문시장 - 대구광역시 중구
활동지 연풍교회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연풍교회 목사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허성도(許聖徒)[1902~1944]의 본관은 김해(金海)로,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경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정(市場町) 서문시장에서 이만집(李萬集) 등의 주도로 계성학교 학생 등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700~8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활보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던 허성도는 김영서(金永瑞)·백남채(白南埰)·최경학(崔敬學) 등 교사들의 권유를 받고 김수길(金壽吉)·이기명(李基明)·이영식(李永植)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허성도는 대구부 신정(新町)의 김수길 하숙집 등지에서 회합을 갖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종식(李鍾植)·김수길·이기명·이영식 등과 함께 4월 2일 ‘동정 표시 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 300매를 등사해 서문 밖 상가에 배포하고, 상인들에게 폐문 철시를 권유하였다. 4월 6일에는 대구 경찰서장에게 경고장을 우송하고 ‘동정 경고문’ 제2호 약 400매를 등사하여 대구 시내 요소에 배부하였다. 또한 4월 7일경 다시 ‘동정 경고문’ 제3호로 폐점 경고문 300매를 등사하여 시내에 배부하는 한편, 4월 13일에는 자제회(自制會)를 주도한 박중양(朴重陽)·백응훈(白應勳)에게 경고장를 발송하였다. 허성도의 독립운동으로 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자, 허성도는 이영식·이기명 등과 함께 피신하였다. 하지만 김수길·이종식·이영옥(李榮玉)·최재화(崔載華) 등은 4월 17일 ‘혜성단(慧聖團)’을 조직해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5월 중순 이후 주요 인사들과 함께 허성도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허성도는 3.1운동과 관련하여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 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어 유인물 배포 활동으로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사문서 위조 행사 죄목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허성도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목사가 되었다. 1942년에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연풍교회 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하며 신자들에게 독립 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1943년 9월 13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가 1944년 6월 4일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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