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산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74
한자 達山事件
영어공식명칭 Dalsan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용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 4일연표보기 - 달산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6년 10월 4일연표보기 - 달산사건 종료
발생|시작 장소 달산국민학교 -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대지리 지도보기
성격 사건

[정의]

1946년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일원에서 일어난 좌우익 대립 사건.

[개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경상도 대구 지역은 식량이 부족하였다. 미군정 당국의 실정(失政) 때문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해 1946년 10월 1일에 대구에서 일어난 폭동은 삽시간에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4일 영덕군 달산면의 좌익 세력이 우익 진영 및 행정 관리를 구타하고 민가를 파괴·방화·약탈하였다.

[역사적 배경]

광복 이후 대구 지역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좌익 세력은 이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자 미군정 당국은 1946년 9월 7일 좌익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위기에 몰린 좌익 세력은 9월 23일에 부산에서 총파업을 감행하였다. 부산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월 사건으로 이어졌다.

[경과]

대구 10월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좌익 단체는 장날인 1946년 10월 4일에 거동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순찰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거사일을 다음 장날인 10월 9일로 연기하였다. 그런데 달산면의 좌익 단체들은 연기된 사실을 통보받지 못하였다. 마침 10월 4일은 달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10월 4일 달산면의 좌익 세력은 운동회가 거의 끝날 무렵인 오후 3시에 운동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1명이 단상에 올라가 시국 정세에 대하여 연설을 한 뒤 동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군중들을 선동하였다. 잠시 뒤에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터지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때 좌익 단체원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우익 인사들을 구타하고 납치해 갔다. 그야말로 운동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그 후 폭도들은 학교 교문을 지나 대지리와 대곡 상류를 거쳐 주응리·옥산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익 진영 사람들을 구타하였고 민가를 파괴·방화·약탈하였다.

[결과]

1981년에 편찬된 『영덕군지』에서는 당시 좌익 세력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첫째, 달산면 사무소 일부 파괴 및 기물 집기, 중요 문서 소각·파괴·절취·폐기, 둘째, 경찰지서 파괴, 기물 서류 완전 파괴, 셋째, 우익 진영 간부급 가옥 20여 채와 가재 도구 완전 파괴 넷째, 달산면장 신태순(申台淳) 살해, 다섯째, 구타로 인한 중상자는 약 25명, 여섯째, 달산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연맹 총무 납치 등이다.

[의의와 평가]

달산사건은 광복 이후 영덕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좌우익 간 유혈 대결이다. 달산사건 이후 지역의 일부 좌익 세력은 인근 산악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확보하고 빨치산이 되어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다. 따라서 달산사건은 빨치산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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