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50
한자 知品面三一獨立運動
이칭/별칭 지품면 만세시위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연표보기 - 지품면 3.1독립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4일연표보기 - 지품면 3.1독립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원전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원전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세영|김중명|주명우|임순근|문의향|윤악이|신분금|기독교 북장로파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2시 3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11일 무렵 지품면 황장동(黃腸洞) 교회의 집사 주명우(朱明宇)는 『매일신보』를 보고 서울과 기타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런 가운데 3월 16일 영해면의 김세영(金世榮)이 보낸 김중명(金重命)으로부터 영덕군에서도 3.1운동이 추진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이에 3월 19일 원전동(院前洞)[원전리] 장날 만세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종이 깃발을 만들어 ‘대한독립 만만세(大韓獨立 萬萬歲)’라고 적은 후 마을 신자 14~15명에게 시위 참여를 권유하게 된다.

[경과]

3월 19일 정오 무렵 원정동 시장에 도착한 주명우는 종이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황장동 교회 신자인 정순용(鄭順用)·김주일(金周日)·박기동(朴基東)·김석이(金錫伊) 등도 주명우의 권유와 외침에 호응하였다. 그러자 이석산(李石山) 등 시장에 모인 군중들도 동참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날인 3월 20일에는 신안동(新安洞)[신안리]의 윤석초(尹石蕉) 집에 임순근(林順根)·문의향(文義鄕)·김형문(金亨文) 등이 모였다. 윤석초, 임순근, 문의향, 김형문 등은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도 ‘정치의 변혁’을 희망하고 있음으로 거사를 일으키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구 한국 국기를 본떠 종이 깃발 1기(旗)를 제작하였다. 임순근은 깃발에 ‘대한조선 독립만세(大韓朝鮮 獨立萬歲)’라는 글을 썼다. 오후 9시경 윤석초 집에 약 6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문의향이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을 주민들은 그 뒤를 따라 마을 일대를 줄지어 행진하며 약 2시간 동안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3월 24일 아침 원전동 장날을 맞이해 이번에는 황장동의 윤악이(尹岳伊)가 원전동의 신분금(申分今)을 찾아가 “오늘 여기 시장에서 구한국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윤악이는 주명우의 부인으로 남편이 3월 19일 만세 시위 운동으로 체포되었고, 신분금은 김태을(金太乙)의 부인으로 역시 남편이 3월 18일 영덕 읍내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 체포되었다. 윤악이와 신분금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고 시장으로 나갔다. 정오 무렵 윤악이는 시장 군중들에게 “자신들은 여자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여 한국 만세를 부른다.” 등의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신분금도 호응하여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과]

윤악이·신분금은 지품경찰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8월,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지품면 3.1독립운동은 3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개신교 및 유림 세력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체포된 남편에 이어 부인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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