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성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008
한자 世居姓氏
영어공식명칭 Residing Clan for Generations in Yeongdeok-Gun
이칭/별칭 토착 성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기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에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는 주요 토착 성씨.

[개설]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에는 일찍이 주요 반촌(班村)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명문 가문이 영덕군 지역에 세거하며 명망 있는 인사를 다수 배출하였다. 현재까지 영덕군 지역에 세거한 주요 가문으로는 대흥백씨(大興白氏)·무안박씨(務安朴氏)·선산김씨(善山金氏)·수안김씨(遂安金氏)·안동권씨(安東權氏)·야성김씨(野城金氏)·야성정씨(野城鄭氏)·영양남씨(英陽南氏)·영천이씨(永川李氏)·영해박씨(寧海朴氏)·재령이씨(載寧李氏)·진성이씨(眞城李氏)·파평윤씨(坡平尹氏)·평산신씨(平山申氏)·함양박씨(咸陽朴氏) 등이 있다.

[성씨의 구분]

조선시대 편찬된 각종 지리지(地理志) 및 읍지류(邑誌類)에는 성씨를 군현의 편성 및 지배 세력의 형성 과정에 따라 토성(土姓)·촌성(村姓)·내성(來姓)·속성(續姓)·망성(亡姓)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토성은 고려 초 지방 군현을 조정하고 성씨를 분정할 때 그 지역에 토착하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향촌 지배층[호족, 호장, 향리 등] 성씨 집단, 혹은 그곳 지명을 본관으로 하면서 읍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성씨 집단을 말한다. 촌성은 군현의 구성단위를 이루고 있는 촌락의 운영을 주도하던 성씨 집단이다. 내성은 군현의 재조정으로 새로이 편입되거나 이주해 와서 향촌 지배층으로 성장한 성씨 집단이다. 속성은 과거의 문적에는 기록이 없으나 당시의 보고서에 추가로 등재된 성씨를 말한다. 그러나 특정 지역의 유력 성씨 집단으로 분정된 토성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조선시대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영덕군 지역의 세거성씨도 이러한 흐름 속에 등장하게 된다.

[지리지 및 읍지(邑誌)의 성씨 추이]

조선시대 영덕군은 영덕현(盈德縣)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 지역의 세거성씨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등의 지리지와 『야성읍지(野城邑誌)』[1785], 『단양부지(丹陽府誌)』[1813], 『영영승람(盈寧勝覽)』[1935] 등의 읍지류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영영승람』은 영덕·영해가 영덕군으로 통합한 이후에 편찬되어 두 지역의 정보를 모두 수록하였다.

『경상도지리지』 영해도호부 편에는 본관을 밝히지 않은 채 토성으로 박(朴)·김(金)·황(黃)·이(李)·임(林)·신(申)의 6성을 기록하고 있다. 촌성이나 내성·속성은 기록이 없다. 영덕현 편에는 역시 본관 표기 없이 토성으로 이(李)·김(金)·조(曺) 3성, 촌성으로 윤(尹)·조(趙)·정(鄭)·주(朱) 4성, 내성으로 박(朴)을 수록해 놓았다. 『경상도지리지』의 성씨 기록은 이후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대체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야성읍지』 등에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

『단양부지』에는 본관을 밝힌 17개 성씨와 본관을 밝히지 않은 5개 성씨를 수록하였고, 『영영승람』에는 영해 지역에 33개 성씨[관향을 밝히지 않은 3개 성 포함], 영덕 지역에 21개 성씨[관향을 밝히지 않은 5개 성 포함]를 나열하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사회에 들어와 터를 잡고 오늘날까지 명망을 이어오는 여러 성씨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거주자가 거의 없거나, 그 수가 매우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어 세거성씨라기보다는 과거의 지리지나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성씨를 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영덕과 영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영덕·영해 지역을 본관으로 둔 성씨로는 야성김씨·야성정씨·영해박씨·야성박씨·영해이씨·영해김씨가 있다. 이들 중 야성박씨·영해이씨·영해김씨는 최근의 인구통계에 포착되지 않거나, 국내 거주자가 극히 희소하여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야성박씨는 『단양부지』에 영해 지역 거주 성씨로 기록되어 있으나, 1977년에 간행된 『한국인의 족보』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2015년 인구통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영해박씨세덕록』에 야성박씨 영덕 입향조인 박종문(朴宗文)의 본관이 영해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 이후 어느 시기에 영해박씨로 관향을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영해이씨는 고려시대 문하시랑을 지낸 이연동(李延東)이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완산이씨(完山李氏)[전주이씨(全州李氏)]에서 분적하여 영해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영해이씨는 1985년 인구통계에 전국 2,042명, 2000년 인구통계에 전국 2,101명, 2015년 인구통계에 전국 2,466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영덕 지역 거주자는 매우 희소하다.

영해김씨 시조는 김억민(金億敏)이다. 김억민은 조선 개국공신 김철의 손자로 병조정랑을 거쳐 영해부사를 역임하여 후손들이 영해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영해부사의 재임 기록에 김억민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영해김씨는 1985년의 인구통계에 전국 726명[영덕 11명], 2000년 인구통계에 전국 718명[영덕 4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으나 2015년 인구통계에는 집계되지 않았다. 시조의 묘소가 함경도에 있고, 후손들이 함경도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한 땅에는 거주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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