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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42
한자 朴啓道
영어공식명칭 Park Gyedo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10월 20일연표보기 - 박계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박계도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86년 10월 17일연표보기 - 박계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박계도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계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371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157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계도는 1900년 10월 20일 태어났으며, 본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된 영덕군 창수면의 3.1운동은 약 200명의 군중이 함께 하였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해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서지고,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을 전부 파손되었다. 만세 군중들은 오후 7시가 되어서야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박계도(朴啓道)는 신기동 만세군중의 권유를 받고, 박봉현·박만복·나채선·신동악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창수주재소에 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그리고 박계도는 같은 마을인 창수동 출신 김반석, 장구동의 박숙이, 신리동의 이석범·박종하, 창수동의 박재흥·윤학근 등과 더불어 몽둥이를 이용하여 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장구동의 오만이, 오촌동의 이기성, 길상동의 김중규, 신리동의 신갑수 등은 돌을 이용하였고, 창수동의 유말동, 신리동의 정석출 등은 발을 이용하였으며, 신리동의 황부칠·우주일·김도치 등은 손으로 창수주재소 벽을 무너뜨리는 데 동참하였다. 창수동의 백수학·이선봉, 신리동의 정재주·오해봉·김연순·김덕규·정학수 등도 함께 창수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일제 경찰이 3.19만세시위 참여자들을 잡아들였는데, 그 가운데 96명이 1차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계도(朴啓道)도 재판에 회부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박계도는 1919년 4월 10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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