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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55
한자 靑年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영덕청년회|오보청년회|남정청년회|강구청년회|영해청년회|경정청년회|영덕청년연맹|영덕청년동맹|강구청년회|신간회 영덕지회|이기석|유웅경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청년들이 벌인 사회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독립운동 세력은 3.1운동에서 분출된 대중의 민족의식과 역동성을 확인하고, 이전까지 소수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대중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대중운동에 주목하였다. 대중도 일제 식민지 지배 정책의 폭압성과 허구성을 인식하고 조선 독립과 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전반 전국에서 독립운동 세력과 대중이 연대하여 각 분야의 대중조직을 결성하였다. 어느 집단보다도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청년들도 조직을 결성하고 청년운동을 벌여 나갔다.

[경과]

1920년대 전반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는 지역 유지와 청년들이 영덕청년회를 가장 먼저 결성하였다. 이어서 오보청년회, 남정청년회, 강구청년회, 영해청년회, 경정청년회 등 면 단위 또는 동 단위의 청년 단체를 결성하였다. 청년 단체는 회원의 친목 도모와 개인 수양에 노력하였으며, 야학 운영과 강연회 등을 통해 청년을 포함한 지역민의 봉건 의식을 타파하고 근대 지식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1920년대 중반 청년운동은 크게 변화하였다. 청년들은 청년 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먼저 조직 혁신을 추진하였다. 주요 의제는 회원의 연령 제한과 조직 체계의 변경이었다. 중장년층 지역 유지 중심의 구성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청년 단체로 거듭나기 위해 회원의 연령을 제한하였다. 기존의 회장 중심의 운영 체제를 폐지하고 민주적인 운영을 강화하기 위해 집행위원회 체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지역 유지의 후원에 의존했던 재정도 회원의 회비로 마련하였다.

청년 운동의 또 다른 변화는 영덕청년연맹의 결성이었다. 청년 단체의 중앙 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은 지역 청년 운동의 역량 결집을 위해 연합 청년 단체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영덕에서도 청년들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청년 단체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강구청년회를 중심으로 영덕군청년연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25년 12월 남정청년회, 삼사동청년회, 오보청년회, 영해청년회, 남정동청년회, 경정청년회가 참여한 가운데 영덕군청년연맹을 창립하였다. 이후 영덕청년회, 축산청년회, 인량청년회 등도 가입하였다. 영덕청년연맹은 지역 청년 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고, 침체 상태에 있던 각 부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0년대 중반 청년 운동은 청년을 포함한 지역민을 대상으로 야학과 강연회 등을 통해 봉건 의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과 과학을 포함한 근대 지식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지역 현안은 물론 일제의 폭압에서 비롯된 전국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결과]

1920년대 후반 청년운동은 또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의 역량 결집을 요구하는 여론에 호응하여 무산계급 청년 중심의 청년 운동을 비판하고,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청년을 포함한 각 계급 계층의 청년들과의 연합을 결정하였다. 지역 차원에서는 노동자·농민 청년, 여성 청년, 형평 청년, 학생 청년 등 각 계급 계층의 청년과 종교 청년 단체의 청년을 포함한 민족주의 계열의 청년까지 포괄하는 군·부 단위의 청년동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영덕에서도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정에 따라 1928년 3월 청년들이 영덕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영덕청년동맹으로 전환하였다. 영덕청년동맹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영덕 북부 지역의 청년들은 영덕청년동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영해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 청년 운동은 이전과 같이 청년과 아동, 일반인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고 강연회 등을 열어 오래된 관습과 봉건 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근대 지식을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다른 지역에 비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청년들은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지역 유지들을 규합하여 신간회 영덕지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주도하였다. 동시에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전국적인 현안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활동에 보조를 맞추었다. 신간회 영덕지회의 결성과 활동 과정에서 활동을 주도하던 이기석, 유웅경 등은 여러 차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거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년운동은 청년을 포함한 영덕 지역민의 봉건 의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과 과학을 포함한 근대 지식을 보급하였다. 동시에 사회의식과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으며, 지역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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