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45
한자 星州歷史-秘密-星山洞古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성주 성산동 고분군 사적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성주 성산성 사적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12월 30일 - 성주 성산성 사적 지정 해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설립
관련 지역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4길 37[성산리 822]지도보기
관련 지역 성주 성산동 고분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 있는 삼국 시대 가야의 고분군.

[개설]

성주군 성주읍의 안산(案山)격인 해발 389.2m의 성산(星山) 정상부에는 성산성이 있고, 이 산성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 고분들이 분포하여 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고분군은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성주읍 성산리선남면 명포리·장학리·신부리에 걸쳐 있어 성주 성산동 고분군(星州星山洞古墳群), 명포리 고분군(明浦里古墳群), 장학리 고분군(壯學里古墳群), 신부리 고분군(新夫里古墳群)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큰 범주에서는 하나의 고분군으로 보아야 한다. 2013년 성주군에서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성산 일원의 고분군에 대한 정밀 지표 조사를 시행한 결과, 성주읍 성산리 일원에 323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선남면 명포리·장학리·신부리성산의 자락에 속한 고분을 포함할 경우에는 그 수가 512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학술 조사로 드러난 고분군의 성격]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1918년에 구 1호분·2호분·6호분[현 56호분·57호분·62호분] 등 3기가 첫 발굴 조사된 바 있으며, 1920년에 대분(大墳)[현 48호분]과 팔도분(八桃墳)[현 53호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실시한 발굴 조사는 그 기간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도굴에 가까운 거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경위나 결과에 대한 보고가 소략하여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1986년~1987년에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의 승왜리 마을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 봉토분 5기[현 50호분·51호분·52호분·54호분·57호분]를 발굴 조사하였으며, 이때 조사한 유구의 구조와 유물의 구성, 고분의 구조 등은 성주 지역을 거점으로 하였던 정치체의 면모와 문물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중부 내륙 고속 도로 개설 과정에서 해당 노선에 포함되어 있는 고분군에 대한 구제 조사를 실시하는 등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매우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고분군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활발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검토해 보면, 고분들은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을 가지고, 봉토분의 외연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둘레돌을 가지며, 봉토분 내부에 하나의 주곽과 하나 혹은 두 개의 부곽을 가지고 있다. 고분군 묘제의 유형으로 보면, 매장 주체부 한쪽 장벽에 잇대어 감실을 설치한 평면 ‘凸’ 자형의 감실 부곽식 고분과 매장 주체부를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식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매장 주체부를 대형 판석을 주로 사용하고 할석으로 보강한 판석식 돌방무덤 등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또한 조사한 고분 묘제의 유형에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만의 특징적인 지역성이 나타난다. 그 지역성은 돌방[석실]의 길이 대 너비의 비율로서 5:1의 세장방형인 대가야 묘제나, 5.5:1 이상의 극세장방형인 함안 아라가야 묘제와 다른 3:1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계통에 친연성을 가지는 묘제라고 할 수 있으며, 대구와 칠곡, 구미, 김천 지역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한 유물의 특징]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출토한 유물은 굽다리 접시와 긴 목 항아리, 짧은 목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그릇 받침 등의 토기류와 금제 귀고리, 은제 관 꾸미개, 은제 팔찌, 은제 허리띠 꾸미개, 곱은 옥, 반지 등의 장신구류, 그리고 둥근 고리 큰칼과 큰칼, 창, 화살촉 등의 무기류와 도끼, 낫, 가락바퀴 등의 농공구류, 재갈, 발걸이, 말 띠 드리개, 말 띠 꾸미개 등의 마구류 등이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의 발굴 조사에서 출토한 유물 가운데 토기는 ‘성주 양식’으로 지칭될 정도로 타 지역 출토 토기와 다른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성주 양식 토기는 ‘5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의 기간 동안 성주 서남쪽의 산지와 동북쪽의 낙동강에 의해 형성된 성주 분지 내에서 제작·사용되어 타 지역과 구분되는 형태적, 제작·기술적 특징[지역색]을 가진 일련의 토기군으로, 굽다리 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 종류에서 특징적인 형태가 나타나며 외면 색조는 대체적으로 흑회색 내지 회청색을 띠고 속심은 암자갈색을 띠며, 외면에 대체로 물결무늬[파상문]가 특징적으로 시문된 기벽이 비교적 두껍고 무거운 일련의 토기군’을 지칭한다.

[성산가야와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산가야(星山伽倻)는 육 가야(六伽倻) 가운데 하나로 벽진가야(碧珍伽倻)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래와 같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오 가야(五伽耶)조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 가야[가락기를 살펴보면 자색줄 끝에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각의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성에 있었는데 즉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은 각기 오 가야의 왕이 되었다. 금관가야(金官伽倻)가 다섯의 수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 사략에 금관이 수에 함께 포함되고 창녕을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는 아라가야[지금의 함안]와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또는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고성]이다. 또 본조 사략을 살펴보면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오 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하나는 금관[김해부], 고령[가리현],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고령의 잘못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나머지 둘은 아라, 성산[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

성산가야의 실체를 밝혀 줄 자료는 매우 빈약하여 위 기록 외의 사료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성산가야에 대한 연구 자료는 『삼국유사』 오 가야조의 기록과 성주에 산재하는 고분군의 발굴 조사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전부이며,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당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금까지 성주는 성산가야의 고지로 알려져 왔고, 또 성주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군을 성산가야의 고분으로 흔히 이해하여 왔다. 성주 지역의 주민들도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지역의 정체성을 성산가야에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성주 지역의 고분[군]은 74개소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성주읍 일원의 성주 성산동 고분군월항면의 수죽·용각리 고분군, 금수면의 명천리 고분군은 대규모 고분군으로서 성주 지역의 3대 고분군으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3대 고분군에는 다른 소규모 고분군에서는 보이지 않은 중대형급 봉토분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 범위가 넓고 입지도 우월하다. 3대 고분군은 성산가야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고분군이 조성되던 시기 성주 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을 축조할 역량을 가진 세 개의 큰 세력 집단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1963년에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학술적 조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당시 지역의 중심적인 정치 세력에 의해 조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되었으며, 봉토분 복원과 전시관 건립 등의 정비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 지역 고대사 연구의 마중물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 즉 『삼국유사』 오 가야조에서 성산가야 또는 벽진가야로 지칭된 기사 외에 별다른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성주의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타 유적들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지역의 중심을 차지하는 고분군으로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우선적인 고려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은 사적으로 지정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을 보존하고 성주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2021년에 설립하였다. 성주의 고대 역사 문화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로서, 지역에서 출토한 각종 유물을 대중에 널리 소개함과 동시에 성주의 생활사 문화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관은 성주군 성주읍 성산4길 37[성산리 822번지] 일원의 4만 6188㎡ 부지에 건축 연면적 2,895㎡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상설 전시실과 어린이 체험실, 가족 쉼터, 야외 전시장, 수장고, 다목적 강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설 전시실에서는 가암리 출토 금동관을 비롯하여 고리자루큰칼, 방울잔, 그릇 받침 등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서 출토한 토기와 장신구, 무기류,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참외씨 등의 유물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1 주제인 ‘성산동 고분군 이전 성주’에서는 성주 지역의 초기 철기 시대~원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상언리백전리·예산리 유적의 출토품을 통해 강성한 소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제2 주제 ‘성산동 고분군 발굴사’에서는 고분군의 규모와 분포 범위, 발굴된 고분의 위치 등은 물론 발굴 조사된 각 고분의 특징과 대표 유물을 함께 배치하여 성주 성산동 고분군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제3 주제 ‘성산동 고분군 속으로’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와 장신구, 농공구, 무기, 말 갖춤 등을 알아보는 공간이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에 대한 정보를 전해 주는 토기,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미의식을 대변하는 장신구, 고대 생산 활동의 단서들을 제공해 주는 농기구와 공구, 전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 체험실과 가족 쉼터에는 발굴 체험 코너인 ‘유물을 찾아보아요’와 ‘유물을 지켜라’ 등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별고을 성주를 여행해요’ 등 성주의 관광 명소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가족 쉼터에는 다양한 연령의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800여 권의 도서와 블록 장난감이 비치되어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의 하위 무덤에 속하는 별티 유적과 차동골 유적의 일부 유구가 이전 복원되어 있고, 금당사 터 배례석과 보월리 절터 주춧돌, 동자석인 등의 석물이 전시되어 있다.

[훼손된 성산성에 대한 아쉬움]

성산성은 성주 성산동 고분군과 한 묶음으로 구성되는 지역적 특징이 담긴 유적으로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이후 성산성 인근 지역이 군 특수 기지가 됨에 따라 산성이 연결 도로로 사용되면서 중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1966년 12월 30일에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군부대 연결 도로로 사용한다는 결정에 따라 국가 지정 문화재가 지정 해제된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남북이 대치하는 대한민국 안보상의 이유로 군부대 설립은 어쩔 수 없지만, 엄연히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국가 지정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하고 지정 해제한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부족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2008년에 발간된 『2008 군부대 문화재 조사 보고서-우리군』에 따르면, 성산성은 성산 정상부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산 정상부 대부분이 훼손되었고, 원래의 지형이 남아 있는 부분은 경계면을 따라 복토된 사면 부분과 북편 능선의 일부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존에 알려진 산성과 관련한 성벽이나 문 터 등의 유구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외 부대의 북서편 모서리에 각종 고지도와 문헌에 표기된 조선 시대 성산 봉수지로 알려진 부분이 있으나, 그곳에는 성산성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 그 흔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2016년 어느 날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 포대의 배치 장소가 성산성 정상의 군부대로 결정되면서 지역 사회에 큰 반대가 일어났다. 처음 반대의 이유는 전자파·소음 등의 영향으로 인한 피해에서 비롯하였지만, 반대 운동이 지속되면서 문화유산인 성산성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게 되었다. 제대로 관심 받지 못하고 간과되고 있던 성산성의 파괴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1966년에 문화재에서 지정 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부대가 들어선지 50여 년이 지나다 보니 그 존재 사실조차 잊힌 성산성이 사드 배치를 계기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전부터 가야에 관심을 두고 있던 학계의 전문가들은 성산성이 훼손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군부대의 이전과 산성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사드 배치 문제가 성산성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을 촉발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드 포대의 배치 위치가 최종적으로 성산성이 아닌 성주군 관내의 다른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염려되었던 추가적인 훼손은 없었지만, 복원해야 할 유적이 거듭 훼손될 위기에 처하였었다는 사실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성주의 옛 역사를 담은 성산 일원의 유적과 관련하여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산성을 다시 성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이미 50년 이상 군부대가 주둔함에 따라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 또는 훼손되었지만, 이제라도 군부대가 이전하고 유적에 대한 정밀 조사 및 정비가 이루어진다면 때를 놓쳐 기회를 잃고 탄식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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