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구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08
한자 布川九曲
영어공식명칭 Pocheongugok
이칭/별칭 「포천구곡차무이도가(布川九曲次武夷櫂歌)」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92년 - 이원조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71년 - 이원조 사망
배경 지역 만귀정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지도보기
성격 한시
작가 이원조

[정의]

조선 후기 이원조가 성주 지역에 은거하면서 지은 한시.

[개설]

조선 후기 문신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는 오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1851년(철종 2)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화죽천 포천 계곡 상류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은 후, 주자(朱子)[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과 「무이도가(武夷櫂歌)」 창작을 따라 포천구곡(布川九曲)을 경영하면서 포천구곡시 「포천구곡차무이도가(布川九曲次武夷櫂歌)」를 창작하였다.

[구성]

「포천구곡(布川九曲)」은 모두 10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자가 지은 「무이도가」를 차운한 작품이다. 『응와집(凝窩集)』 권2에 실려 있다.

[내용]

이원조는 주자의 무이구곡 경영을 따르고자 포천 계곡의 승경에 구곡을 설정하였다. 이원조가 설정한 구곡의 명칭은 1곡 법림교(法林橋), 2곡 조연(槽淵), 3곡 구로동(九老洞), 4곡 포천(布川), 5곡 당폭(堂瀑), 6곡 사연(沙淵), 7곡 석탑동(石塔洞), 8곡 반선대(盤旋臺), 9곡 홍개동(洪開洞)으로, 이원조의 구곡시는 이원조가 설정한 각 곡을 대상으로 창작되었다. 또한 이원조의 구곡시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모방하긴 하였지만, 가야산 북쪽 포천 계곡 상류의 아름다운 경관을 실질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포천구곡」 서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산 위에 선령이 있어/ 산이 절로 깊으며 물이 절로 맑아라/ 산 밖에 노니는 지팡이 이르지 않아/ 달은 밝고 생학 소리만 들을 뿐이네[伽倻山上有仙靈 山自幽深水自淸 山外遊筇曾未到 月明笙鶴但聞聲].” 서시에서 이원조포천구곡이 위치한 가야산의 신령스러움과 속세와의 완전한 단절을 형상화하여 포천구곡의 청정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시 이후 1곡 법림교에서는 “일곡이라 모래 여울 배 띄울 수 없고/ 법림교 아래에서 맑은 시내 시작되네/ 유인이 이곳에서 원두를 찾아가는데/ 골짝 가득 무지개빛 저녁연기 끄네[一曲沙灘不用船 法林橋下始淸川 遊人自此尋源去 滿壑虹光拕夕烟].”라고 하여 이원조의 구곡 유람이 단순히 산수를 즐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두(源頭)를 찾아가는 것임을 보여 준다. 마지막 9곡인 홍개동을 노래한 부분에서는 “구곡이라 홍개동이 넓게 펼쳐지니/ 오랜 세월 이 산천을 아껴서 숨겼네/ 새 정자 자리 정해 이 몸 편히 하니/ 인간 세상에서 별유천이 아니겠는가[九曲洪開洞廓然 百年慳秘此山川 新亭占得安身界 不是人間別有天].”라고 하여 자신이 머물고 있는 만귀정과 홍개동이 세속과 단절된 별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징]

이원조는 오랜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만년에 만귀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 경영을 따라 가야산 포천 계곡포천구곡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포천구곡을 경영하면서 직접 「포천구곡」을 짓고 「포천구곡도」를 그림으로써 구곡 경영을 완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원조포천구곡 경영과 「포천구곡」 창작은 조선 후기 영남 남인의 구곡 경영의 실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이원조「포천구곡도」를 제작하고 만귀정과 그 주변 승경들을 대상으로 문인들과 함께 시를 지어 이를 『포천도지』로 남겼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구곡 문화의 실제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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