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40
한자 張基奭
영어공식명칭 Jang Giseok
이칭/별칭 진여(震汝),자하(紫下),장기석(張基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0년 11월 22일연표보기 - 장기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장기석 일본 왕의 천장절 참석 거부로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7일 - 장기석 성주경찰서 유치장에서 단식 투쟁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9일 - 장기석 대구형무소로 이감, 단식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월 5일 - 장기석 단식 27일 만에 옥중 순국
몰년 시기/일시 1911년 1월 5일연표보기 - 장기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장기석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장기석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장기석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장기석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활동지 장기석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진여(震汝), 호는 자하(紫下). 이명으로 장기석(張基錫)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 선조 때 성주로 입향한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1566~1644]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세헌(張世憲)이다.

[활동 사항]

장기석(張基奭)[1860~1911]은 1860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家谷, 혹 執谷]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공부를 하지 못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나, 25세에 함양 박씨와 결혼한 이후 농사에 힘써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졌다. 부인의 권유로 39세에 수당(守堂) 여심연(呂心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43세에 사서육경(四書六經)을 통달하였다. 이후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민족정기와 독립 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에 매진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성주군수로부터 일왕의 생일 축하식, 소위 천장절 축하식 참석을 강요받았다. 장기석은 “일본 임금의 경절(慶節)에 내가 무슨 상관(相關)이냐?”고 하면서, 통지서 뒷면에다 “내 머리는 가히 끊을 수 있을지라도 발은 옮기지 못하겠다.[我頭可斷足不可移]”라고 써서 되돌려 보냈다. 군수가 성주경찰서에 알려 순사 5명~6명이 출석을 독촉하러 집으로 찾아왔다. 장기석은 “나는 갈 수 없으며, 또 내일은 딸의 우귀(于歸)[신행]이니 내가 집에 없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순사들에게 술을 내어 접대하자, 순사들이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우리는 당신을 잡으러 왔지 술을 마시러 오지 않았다.”고 하며 화를 냈다. 장기석은 “음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목침을 들어 순사를 내리치고, 강제로 붙잡혀 성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장기석성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날인 1910년 12월 7일부터 음식을 전폐하였다. 성주경찰서장은 손수 결박을 풀고 의자에 앉도록 하면서 “선생”으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미 합방(合邦)했으니 그럴 것이 없소. 선생의 소원(所願)이 계시거든 말씀하시오.”라고 하니, 장기석이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다. 일본 국왕은 우리나라의 적이다. 합방되던 때에 죽지 않은 것은 동포가 단합하여 너희 놈들을 격멸하기 위함이다.”라고 대응하였다.

성주경찰서장은 장기석이 자결할까 두려워하면서 대구로 압송하였다. 대구로 가는 중로(中路)에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원(多富院)에 이르러, 주점(酒店)에서 막걸리 큰 잔 하나를 청하여 “내 이제 죽으려 하는데 결배(訣盃)가 없을 수 없다.”하고 통음(痛飮)하고는 다시는 먹지 않았다. 1910년 12월 9일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장기석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1911년 1월 5일 단식 27일 만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11년 3월 8일 유림 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35년 도내의 유림들이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경상북도 기념물]를 세웠다. 그러나 1936년 4월 26일 일제는 “장기석은 일생 동안 일본을 반대하였으며, 해동청풍비는 조선의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므로 파괴한다.”고 하며 파괴하였다. 그리고 부인 함양 박씨는 일경이 비를 파괴하기 전날 비석 아래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1937년 해동청풍비 옆에 부인 함양 박씨의 기열비(紀烈碑)를 세웠다. 1946년 파괴되었던 비는 철편(鐵片)으로 복원하여 심산 김창숙(金昌淑)이 찬(撰)하였고,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글씨를 썼다.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