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회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02
한자 宋晦根
영어공식명칭 Song Hoegeun
이칭/별칭 춘여(春汝),괴당(槐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5월 18일연표보기 - 송회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송회근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서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송회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0일 - 송회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9년 3월 18일연표보기 - 송회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송회근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회근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4년 10월 29일 - 송회근 추모 백세각 항일 의적비 건립
출생지 송회근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고산리 542]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송회근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고산리 542]
활동지 송회근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명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군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도 계획·준비하여 당일 만세 시위의 선봉 역할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춘여(春汝), 호는 괴당(槐堂). 조선 성종 때 문신 충숙공(忠肅公)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의 17대 종손이다. 아버지는 송준모(宋浚謨),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송회근(宋晦根)[1877~1949]은 1877년 5월 18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고산리 542]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가 있어 일찍이 숙부인 공산(恭山) 송준필(宋俊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1902년 법부 주사(法部主事)를 지냈다. 1917년 6월에 조부상을 당하여 맏손자로서 여막 생활을 하던 중에 3.1 운동을 맞았다.

1919년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으나,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 측은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유림 측의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송준필·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 장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송준필 등을 중심으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도 계획·준비하고 각지의 유생들에게 연락하였다.

송회근송준필·송인집(宋寅輯)·송홍래(宋鴻來)·송규선(宋圭善) 등의 친족들과 함께 파리 장서에 서명한 뒤, 각지를 두루 돌며 유생들의 서명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창숙이 서명자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성주에 들렀을 때는 사촌 동생 송수근(宋壽根)을 시켜 여비 명목으로 1,000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29일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숙부 송준필이 작성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지로 배포하는 한편, 성주 백세각 다락방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도 철저히 준비하였다. 개신교 측에서도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읍장 장날, 개신교 인사들이 먼저 만세 시위를 벌이자 유생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송회근송규선·이봉희(李鳳熙)·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김희규(金熙奎)·송천흠(宋千欽)·송인집·송우선(宋祐善) 등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송회근은 3일 뒤인 1919년 4월 5일에 숙부 송준필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4월 30일에 기소된 후 5월 20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불복하여 바로 공소했으나, 1919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며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재판정에서 판사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는지를 묻자, “숙부[송준필]의 거사를 어찌 내가 알지 못하였겠소?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인데 내가 어찌 무심하겠소? 다만 상주(喪主)의 몸이라 뜻을 펴지 못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1949년 3월 1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4년 10월 29일 백세각 항일 의적비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3에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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