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34
한자 鄭思道
영어공식명칭 Jeong Sado
이칭/별칭 정양필(鄭良弼),정사도(鄭思度),설곡(雪谷),역정(櫟亭),문정(文貞),일성군(日城君),오천군(烏川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18년연표보기 - 정사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36년 - 정사도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41년 - 정사도 권지전교 교감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47년 - 정사도 정방 제조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48년 - 정사도 국자감시 주관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정사도 밀직부사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정사도 경상도순문사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68년 - 정사도 순군옥에 하옥됨
활동 시기/일시 1371년 - 정사도 지밀직사사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375년 - 정사도 정몽주·김구용·이숭인 등과 함께 유배
몰년 시기/일시 1379년연표보기 - 정사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40년 - 정사도 오천서원에 배향
부임|활동지 정사도 부임지 - 개성특별시
부임|활동지 정사도 부임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묘소|단소 정사도 묘소 - 개성특별시[비무장 지대 내]
사당|배향지 오천서원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서원재로166번길 32-47[원리 591-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일(延日)[경상북도 포항시 영일읍]
대표 관직 경상도순문사|지밀직사사

[정의]

성주 배씨와 혼반을 맺은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도(思道), 호는 설곡(雪谷)·역정(櫟亭).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읍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균지(鄭均之)이고, 할아버지는 정윤(鄭潤)이며, 아버지는 정유(鄭侑)이다. 어머니는 인천 채씨(仁川蔡氏)로 채유길(蔡惟吉)의 딸이다. 두 차례 장가를 들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성주 배씨(星州裵氏)로 위위시 소윤(衛尉寺少尹) 배현보(裵玄甫)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청주 정씨(淸州鄭氏)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포(鄭誧)[1309~1345]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사도(鄭思道)[1318~1379]의 어릴 적 이름은 정양필(鄭良弼)이었는데, 1336년(충숙왕 복위 4) 과거에 급제한 뒤, 이름자에 피해야 할 글자가 있게 되자, 정사도(鄭思度)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공민왕(恭愍王)을 섬기면서부터 다시 정사도(鄭思道)로 고쳤는데, 그 뜻은 물러나 있든 나아가 있든 도(道) 아닌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봄에 권지전교 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으며, 벼슬길에 들어선 지 10개월 만에 참관(參官)[6품의 관원]이 되었다. 이후 1348년(충목왕 4)에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박형(朴形)[?~1398] 등 92명을 선발하였고, 30세라는 이른 나이에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사도는 간언(諫言)을 담당하는 사의대부(司議大夫)로 임명될 만큼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신돈(辛旽)[?~1371]이 최영(崔瑩)[1316~1388]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밀 때에는 이를 저지하다가 신돈에 의해 직책에서 파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1368년(공민왕 17)에는 왕륜사(王輪寺)에 있던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을 마암(馬巖)으로 이건하려던 계획에 반대하다가 순군옥(巡軍獄)[고려 시대 순군에서 도적이나 난을 일으킨 사람을 잡아 가두기 위해 만든 감옥]에 하옥되었으며, 1375년(우왕 원년)에는 당대의 권신 이인임(李仁任)[?~1388]을 해치려는 모의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정몽주(鄭夢周)[1337~1392]·김구용(金九容)[1338~1384]·이숭인(李崇仁)[1347~1392] 등과 함께 유배를 당하였다.

한편, 정사도가 성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배현보의 딸인 성주 배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면서부터이다. 이후 성주 배씨는 둘째 딸을 출산하기 위해 친정인 성주에 내려왔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인해 친정에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현재 성주 배씨의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용각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정사도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시(詩)에 씩씩한 기상이 있어서 동료들 사이에서 일찍이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1336년에 채홍철(蔡洪哲)[1262~1340], 안규(安規)가 주관한 과거에 응시하여 19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현재 『동문선(東文選)』에 「서강수부(西江帥府)」 등 10수의 한시가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개성특별시에 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정사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청주 정씨를 기리기 위한 제단이 존재한다.

[상훈과 추모]

정사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여 공민왕으로부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또한 우왕(禑王) 때에는 오천군(烏川君)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공신의 호를 추가로 하사받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725년(영조 1)에 이달장(李達章) 등이 오천서원(烏川書院)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져 1740년(영조 16)에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함께 추향(追享)되었다. 사후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묘지명을 지어 그 행적을 기렸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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