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538
한자 星州呂氏
영어공식명칭 Seongju Yeo Clan
이칭/별칭 성산 여씨(星山呂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성주읍 백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성주 - 경상북도 성주군
입향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야동 지도보기
성씨 시조 여어매
입향 시조 여양유

[정의]

여어매를 시조로 하고, 여양유를 입향조로 하는 성주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성주 여씨(星州呂氏)의 시조는 중국의 여어매(呂御梅)이고, 입향조는 여양유(呂良裕)이다. 시조 여어매는 중국 당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원 태학사(翰林院太學士)를 지낸 후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신라로 건너와 전서(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입향조인 여양유는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고, 1380년(고려 우왕 6)에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刀)를 토벌할 때 성주에서 군량을 공급하는 일을 맡으면서 성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양유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성주 여씨성주읍 백전리 야동, 벽진면 수촌리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여양유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여위충(呂渭忠)과 둘째 아들 여위현(呂渭賢)이다. 여위충은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의 파조이고, 후손들은 주로 성주와 대구에 살고 있다. 여위현은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이며, 후손들은 주로 경상북도 성주, 금릉[현 김천], 대구 등에 거주하고 있다. 여위현의 후손인 여우창(呂遇昌)의 아들 여희림(呂希臨)[1481~1553]은 원정공파(圓亭公派)의 파조인데, 중종의 아들 복성군(福城君)의 사부로 천거되었고 현량과에 올라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여희림은 1504년(연산군 10)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야동에서 벽진면 수촌리로 이거했고, 천곡서원과 운양서원에 향사되었다.

[입향 경위]

입향조 여양유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성주에서 군량을 공급하는 일을 맡으면서 성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여희림성주읍 백전리 야동에서 벽진면 수촌리로 이거하였다.

[현황]

2010년 6월 말 기준으로 성주군 벽진면 수촌 2리 석지성주 여씨 70가구가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고, 금수면 광산 1리에는 17가구가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에 문화재 자료 구강재(龜岡齋)가 있다. 구강재는 조선 중기에 남전향약을 처음으로 시행한 원정(圓亭) 여희림을 모시는 재실(齋室)로, 1558년(명종 13)에 여희림이 아버지 여우창의 시묘살이를 한 장소에 건립하였다. 이름은 여우창의 묘터가 강에서 놀던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오르는 형상이라고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성주 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1996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토석 담장이 둘린 방형의 대지에 동남향한 재실과 고직사(庫直舍)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959의 석지 마을 중앙에는 국반재(菊伴齋)가 있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된 국반(菊伴) 여응규(吕應奎)[1800~1876]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경에 세운 재실이다. 여응규여희림의 후손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875년(고종 12) 통정대부가 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우측에 1칸의 마루를 두고, 좌측에는 통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성주로 2495에는 경상북도 기념물인 월회당(月會堂)이 있다. 1516년(중종 11)에 여희림이 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고 시행하기 위한 강회소(講會所)로 창건한 건물이다. 월회당이란 이름은 월일강회(月一講會)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으로,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모여 향약 강회를 가져야 된다는 뜻이다. 강회에는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1칸 규모의 월회당,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전사청(典祀廳), 앞면 4칸, 옆면 1칸 규모의 고직사와 솟을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광조(趙光祖)가 여희림이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조정에 알렸고, 1517년(중종 12) 전국에 여씨향약을 시행하라는 왕명이 내려지며 향약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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