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04
한자 裵德文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of Bae Deokmun
이칭/별칭 서암 배덕문 신도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97-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배덕문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25년 - 배덕문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03년 12월 17일 - 배덕문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97-8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배덕문|이만계|송홍래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210㎝[높이]|87㎝[너비]|24㎝[두께]

[정의]

1920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배덕문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세운 비.

[개설]

배덕문(裵德文)[1525~1603]의 본관은 성산이고,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이다. 할아버지는 배맹성(裵孟成), 아버지는 배주(裵綢), 어머니는 농서이씨(隴西李氏)로 이세무(李世茂)의 딸이다. 부인은 백거추(白巨鰍)의 딸 정부인(貞夫人) 선산백씨(善山白氏)이고 아들은 병조판서에 추증된 좌수사(左水使) 배설(裵楔)이다. 1553년(명종 8) 29세때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주서(注書),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언양군수, 영덕군수, 울산군수, 고부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공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하여 현감 재직지에 모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승려 찬희(贊熙)가 성주목사 제말(諸抹)을 죽이고 스스로 목사가 되어 백성들을 도륙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은퇴 후 금수면에서 살고 있던 선비 배덕문은 창의하여 의병장으로 대활약하였다. 당시 68세 노구로 성주성을 탈환한 배덕문의 군공으로 선무원종 이등공신(宣武原從 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873년(고종 10)에는 이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타고난 성품과 공직자로서의 청렴성, 의병장으로서의 공적 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20년 신도비를 세웠다.

[건립 경위]

배덕문은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영덕군수, 고부군수 등 여러 요직을 거치고 성주로 귀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쏟고 있었다. 효심이 지극하고 공손하며 특히 공직자로서의 청렴성과 근검절약 정신 등 모범이 되는 관료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68세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후학들을 격려하고 의병장으로서 모범을 보여 성주성을 탈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배덕문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20년에 배덕문 신도비(裵德文神道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배덕문 신도비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97-8번지에 위치한다. 뒷개 마을과 청룡 마을 사이 소구릉 하단 도로변[대금로]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형태]

비신과 이수, 귀부로 이루어져 있고 비신 4면에 걸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 전체 크기는 높이 376㎝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0㎝, 너비 87㎝, 두께 24㎝이다.

[금석문]

비문은 조선 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만계(李晩煃)가 짓고, 홍문관 시독 겸 지제교(弘文館侍讀兼知製敎) 정재교(鄭在敎)가 전액(篆額)을 쓰고, 후학인 지제교(知製敎) 송홍래(宋鴻來)가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배덕문의 가계부터 타고난 성품과 효심, 공직자로서의 윤리 의식 등을 기술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공으로 추증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황]

국도 제30호선 변에 위치한 배덕문 신도비와 남서쪽으로 6기의 신도비가 함께 관리되고 있다. 성주성산배씨종친회는 배덕문, 배설 부자의 신도비와 함께 병조참의 고암 배건(裵楗), 등암 배상룡(裵尙龍), 좌승지 괴재 배상호(裵尙虎)의 유허비와 병조 판서 명암 배즙(裵楫), 교남 배기훈(裵基薰)의 송덕비를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성주성산 배씨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는 이 곳은 현재 숭조대(崇祖臺)라 이른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관료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배덕문의 공적과 그의 일대기를 기리는 신도비로 향토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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