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23
한자 東學農民革命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Revolution
이칭/별칭 동학 농민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8월 25일연표보기 - 동학 농민 혁명 발생
종결 시기/일시 1894년 9월연표보기 - 동학 농민 혁명 종결
발생|시작 장소 동학 농민 혁명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동학 농민 혁명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농민 항쟁
관련 인물/단체 이승희|도한기|오석영|송준필|동학 농민군

[정의]

1894년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 농민군의 활동과 성주 유림의 대응.

[개설]

1894년 8월 25일 동학교도들이 성주 지역에 들어와 성주목 관아를 점령했으나, 8월 27일 성주목(星州牧)의 향리와 유생들이 축출하였다. 같은 해 9월 6일 동학 농민군이 다시 성주읍을 점령하자, 향리 출신의 유생 도한기(都漢基)가 수성 조목 15개조를 작성하여 민보군(民堡軍)을 결성하고 동학 농민군에 대응하였다.

[역사적 배경]

동학은 1864년 3월 10일 교조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처형된 이후, 대원군 정권과 민씨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교문의 조직망을 확장하였다. 이후 1892년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공인해 줄 것을 요구한 삼례 집회(三禮集會)와 1893년 2월 교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伏閤上疏), 그리고 같은 해 3월 척양 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든 보은 집회(報恩集會) 등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동학은 관헌의 지목과 탄압의 대상인 사교가 아닌,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종교로 공인을 받기 위해 조직력을 총동원하였다.

1893년 3월부터 성주 지역의 동학은 보은 집회 이후 상주에서 김산(金山)·지례(知禮)를 거쳐 전파되었고, 조직적으로 이들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목되는 점은 보은 집회에 30여 명 이상의 교도를 참가시킬 정도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1894년에 들어서는 상주·진주·하동·예천·김산 등지와 더불어 동학군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893년 3월 17일 조정에서 양호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했을 때, 이승희(李承熙)가 어윤중을 대신하여 조정과 보수 유림의 뜻을 반영한 통문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쓸 정도로 보수적인 유림의 기반이 공고한 곳이기도 하였다.

[경과]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동학 농민군이 들어와 접소(接所)를 세우고 농민들을 규합한 것은 1894년 8월 23일이었다. 이들은 김천·지례 등지에서 들어온 약 40명 정도의 동학도로서 각처를 돌며 양반 지주와 향리를 공격하여 금전을 빼앗고, 25일에는 성주읍에 들어와 소요를 일으키며 관아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각처를 돌며 공납(公納)으로 내는 “내년의 결가(結價)는 결마다 15냥, 호포(戶布)는 호마다 각 6전씩 거두겠다.”고 호언하는 한편, 요민(饒民)을 포착하여 전곡을 토색하고 불응하면 위협을 하고 도피하면 그 처자를 욕보였다. 당시 성주 유생 공산(恭山) 송준필(宋俊弼)[1869~1943]은 입당을 거부하다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매를 맞기도 하였다.

관헌(管軒) 도한기이진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주목의 향리 출신 유학자이다. 도한기성주읍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이 양반 지주와 향리를 공격하고 금전을 빼앗는 상황을 목도하고, 이승희와 함께 성주 읍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을 축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학과 동학 농민군을 사술(邪術)과 화적배(火賊輩)로 인식하고 ‘유학(儒學)의 도(道)를 해치는 자’들로 파악하였다.

성주 지역의 동학 농민군의 활동은 관아와 보수 유림을 위협하였다. 이에 향리들을 주축으로 한 관속들이 농민군의 약탈 행위를 엄단하기로 하고, 8월 27일 성주읍 장날에 읍군(邑軍)을 동원하여 동학 농민군 18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퇴각으로 성주읍을 회복한 향리와 사족들은 목사 오석영(吳錫永)과 함께 인근의 동민들을 소집하여 민보군을 결성하고 동학 농민군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향리 출신의 도한기는 수성 조목(守城條目) 15개 조를 작성하여 민보군의 편제를 체계화하여 읍내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승희 등의 유생들과 논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안으로 공납으로 내는 세금을 감면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도 하였다

한편 성주읍에서 퇴각한 동학 농민군들은 김산·상주 지역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성주읍 탈환을 위한 공격을 준비했고, 9월 초 대규모의 농민군이 대마 시장(大馬市場)에 집결하였다. 8월 27일 이후 성주 읍내 거주자들이 재산을 옮기거나 피신하면서 성주읍은 텅 빈 상황이 되었다. 더욱이 목사 오석영이 야반도주하자 향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하기 시작했고, 양반 유생들도 피신 중인 상황이었다. 9월 6일 동학 농민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성주읍을 점령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성주읍을 전소(全燒)하고 서리(胥吏)와 부호(富戶)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철저하게 보복하였다.

[결과]

경상감사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성주목사 오석영을 파직하고, 조익현(趙翼顯)을 신임 성주목사로 파견하였다. 또 감영의 요청을 받은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 진압을 위해 성주로 출동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학 농민군은 김산·상주 등지로 후퇴하였다.

[의의와 평가]

성주 지역은 동학의 포교가 비교적 원활했고 동학교도가 많았으므로 동학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양반과 향리층의 결속이 강고하였으므로 동학 농민군을 축출하는 데 비교적 용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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