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299
한자 星州史庫
영어공식명칭 Seongju Sag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39년 6월 - 성주사고 설치 건의
공포 시기/일시 1439년 7월 - 성주사고 설치 승인
시행 시기/일시 1439년연표보기 - 성주사고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5년 12월 - 성주사고 실록 보관
관할 지역 성주사고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지도보기

[정의]

1439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설치한 국가 중요 기록물 보관 서고.

[개설]

성주사고(星州史庫)는 조선 시대 국가의 주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 관리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조선 전기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보관소 네 곳 중 하나였고,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내사고(內史庫)와 구분하여 외사고(外史庫)라 불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성주사고는 1439년 6월 사헌부가 상소한 사적(史籍) 분장지책(分藏之策)의 건의를 받아, 한 달 뒤인 7월 춘추관(春秋館)에서 성주와 전주에 사고를 설치할 것을 청해 승인되었다. 성주사고에 실록(實錄)이 보관된 것은 6년이 지난 1445년 12월 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 김길통(金吉通)에게 태조·정종·태종의 실록을 봉안하게 하면서부터였다. 설치 당시 실록각(實錄閣)은 관아(官衙)에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조선은 고려의 사관(史官)과 사고(史庫)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할 때까지 개경(開京)에서 한양으로 내사고를 옮겼다. 1429년(세종 10)에는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하였다. 충주사고가 외사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내사고인 춘추관 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가 운영되었다. 1445년 태조·정종·태종의 실록부터 봉안했고, 『명종실록(明宗實錄)』까지 보관하였다.

건물이 읍치(邑治) 부근에 있고 민가와 인접하여 화재의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양성지(梁誠之)가 성주사고를 선산의 금오산(金烏山)으로 옮기자고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양성지의 염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어 1538년(중종 33) 11월 6일 성주사고가 화재로 불타 버렸다. 불타 버린 실록은 화재가 있은 지 일년 반쯤 지난 1540년 4월에 인출(印出) 및 정서(正書) 작업이 완료되어,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에게 다시 봉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재 이후 실록각이 언제 재건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재건된 사고의 건물은 2층으로 지어, 아래층이 넓게 트이고 2층은 높이 솟아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후기의 다른 외사고 건물들과 비슷한 중층 누각(重層樓閣) 형태의 기와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리 인원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외사고인 충주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명, 별색호장(別色戶長) 1명, 기관(記官) 1명, 고직(庫直) 1명이 있던 것으로 보아 이에 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 등의 서책을 꺼내어 말리는 포쇄(曝曬)는 3년 1차의 규식이 있었으나 시기에 따라 기간의 장단이 있었다. 실록의 봉안·고출(考出)에도 까다로운 의식 절차가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 외사고 실록들을 포쇄할 때는 춘추관의 기사관급(記事官級)이 파견되었다. 외사고에 이르면 반드시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각 앞에서 네 번 절한 다음에 사고 문을 열었고, 포쇄가 끝나 봉인을 한 뒤에는 사배(四拜)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피하기 위해 실록궤를 모두 땅에 묻었으나, 1592년(선조 25) 6월에 왜군이 파내어 불태웠으며 사고 건물도 전란 중에 불타버렸다. 춘추관과 충주의 사고도 불타 없어졌고, 오직 전주 사고만이 병화를 면하였다. 전주 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져 무사할 수 있었다.

실록은 임진왜란 뒤에 전주본을 모본으로 하여 다시 인출했고, 강화도·묘향산·태백산·오대산 등에 사고를 세워 춘추관과 함께 5대 사고(五大史庫)로 재정비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실록의 재인(再印)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나, 1603년(선조 36)에 인쇄에 들어가 1606년(선조 39)에 인쇄가 모두 끝이 났다. 성주사고는 결국 복구되지 않았고, 현재는 터의 위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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