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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52
한자 -性理學者-寒洲李震相
영어공식명칭 Last Neo-Confucian, Hanju Yi Jins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수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8년 7월 29일 - 한주 이진상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서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5년 - 『성명도설(性命圖說)』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7년 - 도산서원 알묘, 퇴계 선생 사숙(私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4년 - 증광 문과 초시 응시 「공부책(貢賦策)」 제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9년 - 경의(經義)로서 증광 생원시에 급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51년 - 『직자심결(直字心訣)』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52년 - 「사칠변(四七辨)」 완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53년 - 『심자고증(心字考證)』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1년 - 『상제편고(喪制便攷)』 편집, 「심즉리설(心卽理說)」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4년 - 『역학관규(易學管窺)』 편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9년 - 『역괘원상(易卦原象)』 편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1년 - 장의(掌議)가 되어 서원 철폐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상경하였으나, 군사들에 의해 강외(江外)로 추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4년 - 동당시(東堂試)에 책문(策問)으로 장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 -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듣고 의병(義兵)을 일으키려다가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그만 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5년 - 족인들과 합천에서 화수회(花樹會)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7년 - 성주 한개 마을 소통령(小通嶺)에 장사 지냄
관련 지역 성주 한개 마을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8[대산리 308-2] 일원지도보기
관련 지역 대산동 한주 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43[대산리 408]지도보기

[정의]

19세기 내우외환의 격동기에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한 학설을 성립하여 한주학파를 형성하게 한 인물.

[개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19세기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격동기에 경상북도 성주에 거주하며 성리학 및 경학을 면밀히 탐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진상은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한 학설을 성립하여 자신의 학문을 계승한 한주학파를 형성하게 한 인물이다. 한주학파는 경상북도 성주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서남부, 경상남도 북동부 등으로 확산되었고, 이전 시대 성리학에서 논쟁이 되었던 문제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구축하고 국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였다.

[성주 한개 마을과 주리세가(主理世家)]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성주 한개 마을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집성촌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민속 마을이다. ‘한개’라는 이름에서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개 마을’은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로 쓰는데, ‘큰 개울’, ‘큰 나루’를 순우리말로 쓴 것이다. 성주 한개 마을에는 ‘주리세가’라고 현판을 걸고, ‘한주’·‘대계(大溪)’·‘삼주(三洲)’라는 세 개의 편액을 현판으로 붙인 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한주 이진상의 종가이다.

이진상의 종가인 ‘주리세가’는 1767년(영조 43)에 지어져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대산동 한주 종택[경상북도 민속 문화재]은 이진상의 증조할아버지 이민검(李敏儉)이 1767년에 건립하였고 1866년(고종 3)에 증손자 이진상이 새로 고쳐 짓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할아버지 이형진(李亨鎭)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제자로 지역의 이름 높은 학자였으며, 두 아들 한고(寒皐) 이원호(李源祜)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형제가 여기에서 태어났다. 이원호는 이진상의 아버지이고 이원조는 숙부이다.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李承熙)[1847~1916]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이며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시대의 책무를 다하는 지식인, 이진상]

19세기 조선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급변하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이 통상을 요구하며 여러 가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외척 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전개되면서 소수 집단이 권력을 휘두르는 파행을 겪고 있었다. 인재 등용의 폭이 극도로 좁아진 가운데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대다수 지식인층은 관료 진출의 희망을 잃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하층 농민에게 옮겨갔으며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62년(철종 13) 항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성주에 살던 이진상도 농민의 항쟁을 직접 목격하였다.

농민 항쟁 이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농민들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한 여러 시책을 마련하였다. 호포제(戶布制), 서원 철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로 인해 양반은 평민과 다름없이 군포 징수의 대상이 되어 특권 의식에 상처를 입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상징적인 장소인 서원이 거의 철폐되어 존립의 근거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이진상은 이러한 대내외 위기 상황에서 현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성주에 사는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진상1862년 농민 항쟁[임술 농민 항쟁]의 수습을 위해 삼정(三政)의 대책을 구하는 조정의 조처에 호응하여 자신의 개혁안을 작성해 올렸다. 또한 철폐된 서원을 서당으로 개칭하여 복구하고, 서원에서 대규모 강회(講會)나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행하여 향촌의 결속을 다졌다. 이진상은 당시 국가의 중대 사안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현실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지식인으로의 시대적 책무를 다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영향은 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진상 학문의 배경과 전개]

이진상은 한문을 공부하면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다가 숙부 이원조의 권유로 성리학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8세 때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짓고 20세 때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사숙(私淑)하고자 하였다. 그 후 성리학을 궁구하며 이황에 대한 각종 도설(圖說)과 변증(辨證)을 지어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27세부터 증광 문과 초시에 장원한 이후, 거듭 공부에 매진하다가, 30세 때에는 운곡노인(雲谷老人)이라던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본받겠다는 의지에서 자신의 서재를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 이름 짓고 더욱 성리학을 연마하였다.

이진상은 학맥이나 학통에서 특별한 스승을 내세우지 않아 독자적으로 학문 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에는 숙부 이원조에게서 배우고, 장복추(張福樞)·이정상(李鼎相)·허훈(許薰) 등과 강론(講論)하였으며, 35세 때 퇴계 학통의 종장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만나 학문적 담론을 하였다. 40세 때 유치명의 수제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진상은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과 유학 경전 연구에 더욱 정진하여 총 89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학문을 탐구하면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그 명성이 널리 퍼져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였다.

이진상은 퇴계를 헌장하겠다는 학문 방향을 밝혔으나 일정한 독자 노선을 걸어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적인 학단(學團)을 열었다. 사승(師承)이나 연원에 구애되지 않고 자득을 중시하였으며, 당론에 매인 편협한 학풍을 혐오하였다. ‘성주’의 지역적 연고가 그의 학문적인 성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성주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고향으로 이 두 사람은 모두 퇴계와 남명(南冥)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이 대립하지 않고 서로 교류하도록 가교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진상은 성주의 선배 학자들의 인격과 학문을 존중하였다.

또한 숙부 이원조 역시 이진상의 학문에 영향을 주었다. 이원조는 일찍이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영남 학인을 비롯하여 기호의 학인들과도 접하며 지역을 초월한 학문적 성향을 보였다. 이원조는 기호학파 학인은 ‘자득(自得)’, 영남학파 학인은 ‘답습(踏襲)’을 각 학파의 특성으로 들면서, 답습하여 정채(精彩)가 없는 것보다 흠이 있지만 자득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는 이진상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진상의 성리학이 ‘절충과 종합’을 추구하면서도 퇴계학파와는 일정한 차별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

「심즉리설(心卽理說)」은 이진상이 44세에 지은 글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진상심즉리설은 명칭에 있어서는 왕양명(王陽明)의 심설(心說)에서 제시한 기본 명제와 동일하게 보이나, 이진상은 자신의 ‘심즉리설’의 의미에 대해 심을 구성하는 리(理)와 기(氣) 속에서 근원적으로 심(心)이 리임을 밝히는 것이라 해명하였다. 자신의 학설과 왕양명의 심즉리설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자신이 성리학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진상은 「심즉리설」에서 ‘심’을 돌[石]과 옥이 섞여 있는 옥의 원석에 비유하면서, 왕양명의 심즉리설은 옥에 섞여 있는 돌까지 옥이라 하는 것으로 본체와 작용을 혼동하여 기에 속하는 심의 작용까지이라 주장하는 것이니 실은 ‘심즉기설(心卽氣說)’이요, 자신의 심즉리설은 원석 속의 옥만을 가리켜 옥이라 하듯이 심의 본체만을 가리켜 이라 하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에서 심즉리설이 되는 것이라 하여, 자신의 학설을 왕양명의 심즉리설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또한 왕양명이 ‘기’를 ‘리’와 오인하였기 때문에 심즉리(心卽理)가 바로 심즉기(心卽氣)임과, 본심의 올바름은 리에 있을 뿐 기에 있지 않음으로 공자(孔子)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從心所欲不踰矩]’과 맹자(孟子)의 ‘양심(養心)’과, 정자(程子)의 ‘마음과 성이 모두 리[心性一理]’라는 말과, 주자의 ‘마음이 태극[心爲太極]’이라는 말과, ‘주재하는 것은 리[主宰卽理]’라는 말이 모두 리를 가지고 마음을 말한 것이니 ‘심즉리’ 세 글자가 요결임을 밝혔다.

이진상의 성리학에 대한 해석은 영남학파의 정통적인 견해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진상의 사후 영남학파 사이에 이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과 학문적 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진상심즉리설은 당대의 성리학계에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승희, 중재(重齋) 김황(金榥) 등 그의 문하에 계승되어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특징적 학풍으로 전승되었다. 그들은 이진상심즉리설에 입각하여 다른 학설을 비판하고 그들의 학설을 옹호하는 논변을 활발히 펼쳤으며, 특히 곽종석·이승희심즉리설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이만인(李晩寅)·이재기(李載基)와 맞서 1886년(고종 23)부터 4년에 걸쳐 논쟁을 벌인 것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진상 학문의 확산과 의의]

이진상의 나이 50세에 이르러 그 명성이 성주를 비롯한 강우(江右) 지역에 널리 퍼졌으므로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들었다. 53세 때인 1870년 봄에 후산(后山) 허유(許兪)에 이어 그 해 겨울에 면우 곽종석이, 1872년에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가, 1874년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1876년 교우(膠宇) 윤주하(尹冑夏)가, 1878년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과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가 들어오게 됨으로써 아들 이승희와 더불어 ‘주문팔현(洲門八賢)’이 되었고, 여기에 130여 명의 문인들로 한주학파가 성립되었다.

이진상이 자신의 성리학을 종합하여 『이학종요(理學綜要)』를 저술하였고, 이후에 제자들이 『한주문집』을 간행하였다, 이진상의 대표 저술은 간행되어 나오자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 비호 세력에게 비판을 받았다. 도산서원에서 문집의 내용 중 퇴계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이 있다고 하며 문집을 반송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이진상의 제자들은 스승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이후 도산서원에서 사과의 글을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진상의 주요 저작들이 발표되어 한주학파가 학문적인 입지를 공고히 한 즈음에 한주학파의 학설은 이단으로 이해되었고, 이진상의 문인들은 성주에서 지내며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1903년 고종이 이진상의 고제(高弟)인 곽종석을 불러 국정의 난맥상과 일제의 침탈에 대응할 방책에 대해 자문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주학파의 위상은 정치적·학문적으로 상승하였다.

[독립운동의 산실, 한주학파(寒洲學派)]

성주의 문인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한주학파는 일제의 조선 침탈이 시작되던 시기에도 학문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이진상의 아들이자 제자인 이승희는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곽종석 등은 1919년 3월에 있었던 유림의 대규모 독립 청원 운동인 파리 장서 운동(巴里長書運動)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에는 곽종석과 장석영 외에 이승희의 제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 인물로 참여하였다. 김창숙은 성주에서 한학을 배우고, 곽종석·이승희 등에게서 한주학파의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김창숙은 솔선수범하는 선비를 표방하며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1906년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자 성주에서 모은 단연금(斷煙金)을 기금으로 성주 청천서원(晴川書院)사립 성명(星明)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鄕射堂)에 설치해 활동하며 혁신적 유학자로서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삼봉서당에서 삼봉서원까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삼봉서원은 한주 이진상을 배향한 곳이다. 애초에 삼봉서원은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892년에 삼봉서당을 건립한 데서 시작되었다. 삼봉서원의 강당 심원당(心源堂)에는 장석영의 ‘상량문(上樑文)’, 이승희의 ‘심원당기(心源堂記)’, 곽종석의 ‘삼봉서당기(三峯書堂記)’ 등 이진상의 문인이자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쓴 현판들로 빼곡하다. 이진상 제자들의 간절한 마음으로 세워진 삼봉서당은 그의 문인들이 모여 학문을 논의하고, 국권 회복을 논의하던 장소였다. 그러나 이진상의 제자들은 독립운동으로 서당을 유지하는 데 전력할 수 없었고, 특히 이승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면서 삼봉서당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삼봉서당은 서원으로 승격되지 못하였다.

2016년 한주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삼봉서당은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삼봉서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한주 이진상에 대한 향사를 올리는 장소로 명맥을 이어오던 삼봉서당은 한주학파 문인들의 염원을 후학들이 이어서 삼봉서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삼봉서원은 한주 이진상의 학문 정신을 계승하고 국권 회복의 중심이 된 역사적 장소로 후대에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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