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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98
한자 宋浚弼
영어공식명칭 Song Junpil
이칭/별칭 순좌(舜佐),공산(恭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9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송준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송준필 파리 장서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송준필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4년 8월 28일연표보기 - 송준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준필 애족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송준필 추모 원계서원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4년 10월 29일 - 송준필 추모 백세각 항일 의적비 건립
출생지 송준필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5[고산리 532]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송준필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5[고산리 532]
거주|이주지 송준필 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
활동지 송준필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파리 장서 운동을 주도한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의 의사를 국제 사회에 직접 호소하려 했으며,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도 주도하였다.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충숙공(忠肅公)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의 16세손이며, 아버지는 송기선(宋祺善), 어머니는 영천 최씨(永川崔氏)이다. 1880년 송대선(宋大善)에게 입양되었고, 송수근(宋壽根)은 아들이다.

[활동 사항]

송준필(宋浚弼)[1869~1944]은 1869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5[고산리 532]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문사(文詞)가 크게 알려졌고 문도(門徒)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월 초 고종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파리 장서 운동[독립 청원 운동]이 계획되었다. 송준필은 고종 국장에 참여했던 경상북도 현풍 사람 이달필(李達馝)[1888~1923]의 방문을 받은 것을 계기로 1919년 3월 초순에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향재(鄕齋)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문중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파리 장서 운동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소신을 밝히고 문중 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어 같은 달 중순에는 아들 송수근을 이웃 고을 원로 장석영(張錫英)에게 보내 협력 의사를 확인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의 주역 김창숙(金昌淑)성주 백세각을 방문하자 송규선(宋圭善)과 함께 경상남도 거창으로 가서 곽종석(郭鍾錫)을 돕도록 조언하였다.

같은 달 하순에는 여보회(吕輔會)에게 아들 송수근을 보내 받은 2,000원을 중국 상하이[上海]로 출발하게 될 김창숙에게 여비로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26일에는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 수천 매를 인쇄하여 군내에 배포하게 했고, 3월 29일에는 제자와 문중 자제들을 모아놓고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가 있을 예정임을 알렸다. 때마침 개신교 측에서도 별개의 만세 시위를 추진하던 오의모(吳義模)가 찾아와 유림과 합류할 것을 요청하여 함께 추진하기로 하였다.

송준필은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벌어진 만세 시위에 다수의 문중 인사들도 참여시켰다. 문중의 송우선(宋祐善)·송천흠(宋千欽) 등은 주막 지붕에 올라가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는 송천흠성주경찰서 옥상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시위 도중 송우선·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 등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야성 송씨 인사들이 다수 붙잡히는 과정에서 파리 장서 운동이 발각되었다.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1919년 4월 5일에 송준필성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어 대구경찰서를 거쳐 4월 16일에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4월 30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자, 불복하며 공소를 제기하여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김천의 황학산 기슭 부곡동에 은거하다가, 1944년 8월 28일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공산집(恭山集)』, 『건삼도발휘(乾三圖發揮)』 2책,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2책, 『육례수략(六禮修略)』 6책, 『정학입문(正學入門)』 2책,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송준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 143번지에 원계서원(遠溪書院)을 건립하였다. 1969년 서원 뒤에 사당 숭덕사(崇德祠)를 지어 1971년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2004년 10월 29일 백세각 항일 의적비를 제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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