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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82
한자 裵鶴甫
영어공식명칭 Bae Hakbo
이칭/별칭 송운(松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0년 8월 19일연표보기 - 배학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7년 - 배학보 선남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46년 - 배학보 대구사범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2월 - 배학보 대구사범학교 학생들과 항일 비밀 결사 다혁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1월 - 배학보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배학보 국민 훈장 석류장 수훈
활동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배학보 건국 훈장 애국장 수훈
몰년 시기/일시 1992년 10월 28일연표보기 - 배학보 사망
출생지 배학보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배학보 이주지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선남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관화2길 2[관화리 873]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활동지 배학보 활동지 - 대구광역시
묘소 국립 신암 선열 공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 71길 33[신암동 산27-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경상북도 학무국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송운(松雲). 아버지는 배계흠(裵桂欽), 어머니는 순천 김씨(順天金氏)이다. 신송악(申松岳)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배학보(裵鶴甫)[1920~1992]는 1920년 8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에 선남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9년 7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일으킨 ‘왜관 사건(倭館事件)’을 계기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8월 동료 학생들과 왜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대책을 논의한 후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을 조직하여 부단장을 맡았고,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등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41년 2월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항일 비밀 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1940년 11월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된 ‘문예부’와 1941년 1월에 조직된 ‘연구회’를 통합한 조직이었다.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문예 예술 운동 등 각 분야의 실력을 양성하며, 민족 운동을 펼쳐 조선의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학생들은 광복과 독립 후 국가 건설을 위해 각기 전문 분야별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개개인의 관심이나 전공 영역별로 법률·정치·문학·역사·경제·철학 등으로 나누어 조직을 구성하였다. 배학보는 다혁당의 부당수와 구기부의 배구부 책임을 맡았다.

학생들은 급박하게 전개되는 세계 정세로 보아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의 독립이 곧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고, 각 분야에서 각자의 재능을 개발하고 최고 권위자가 되어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졸업 후에는 훈도로서 보통학교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유능한 학생의 선발 및 수재 교육을 통해 독립 역량을 확대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규약은 “①당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②당원은 매월 1회 회합하고 당수·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한다. ③각 부장은 책임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한다. ④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⑤정당원은 결당식에 참가한 자에 한하며, 신가입을 인정하지 말 것” 등이었다.

배학보는 학생들과 한글로 된 조선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읽은 후 독후감을 발표하고, 토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일제의 황민화 정책으로 후배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약화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지도하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 접촉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도 벌였다. 독립군에 가담할 경우에 대비하여 체력도 단련하고, 대구 앞산 등지에서 기초적인 군사 훈련도 하였다.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 철폐 방안도 모색하였다.

다혁당은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가 발행한 간행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전모가 드러났다. 한국인 교직원과 동문 등 3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학생들은 2년여 동안 미결수 상태로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배학보를 포함한 34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6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중등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경상북도 학무국장을 지냈다. 1992년 10월 28일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 71길 33[신암동 산27-1]의 국립 신암 선열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공을 기려 1986년 국민 훈장 석류장을 수여했으며,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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