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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80
한자 裵成龍
영어공식명칭 Bae Seongryong
이칭/별칭 배수성(裵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인(星山人)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10월 28일연표보기 - 배성룡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배성룡 성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4년 - 배성룡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5년~1919년 - 배성룡 성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배성룡 조선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다 퇴사
활동 시기/일시 1925년경 - 배성룡 사회주의 단체 화요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3월 - 배성룡 조선공산당 입당
활동 시기/일시 1926년 7월 7일 - 배성룡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배성룡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8년 9월 - 배성룡 출옥 후 조선일보사, 중앙일보사에서 언론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64년 12월 8일연표보기 - 배성룡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배성룡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배성룡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51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배성룡 거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5가길 16-6[누하동 10-1]
학교|수학지 성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4길 9[경산리 183]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일본대학 - 일본
활동지 배성룡 활동지 - 서울
성격 언론인|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본관 성주
대표 경력 『조선 일보』 기자|민족자주연맹 중앙 집행 위원|『한국 일보』 논설위원

[정의]

일제 강점기 국내 항일 언론 활동을 전개한 성주 출신의 언론인.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필명으로 배수성(裵秀星), 성산학인(星山學人), 성산인(星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배운홍(裵運鴻)이며 어머니는 류윤이(柳允伊)이다.

[활동 사항]

배성룡(裵成龍)[1896~1964]은 1896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경산동 251[현 성주읍 경산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성주공립보통학교[현 성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4년간 성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1924년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를 졸업한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1924년 7월과 8월에 걸쳐 『조선 일보』에 「사회 변혁과 사상적 고찰」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가을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8월 『동아 일보』 경제 논문 현상 모집에 공모하여 당선되었고,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1 야체이카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화요파의 이론가로서 코민테른(Comintern)의 반제 연합 전선 전술을 소개하며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그 뒤 정우회(正友會)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6년 7월 7일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붙잡혔고,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8년 9월에 만기 출옥한 뒤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가 퇴사하고 1931년 11월 중앙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재직하던 중 친일 사장 노정일(盧正一)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였다. 이후 기자로서 『조선 일보』와 『중앙 일보』에 민족 문제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언론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4년에는 의열단의 국내 연락책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로는 각종 정치 조직에 참여해 정당 통일 운동에 나섰고, 1946년 7월에는 좌우합작촉성회에 가입하여 정당 통일 운동을 후원하였다. 1947년 2월에는 민주주의독립전선 조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김규식(金奎植)의 민족자주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이후에는 김구(金九)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 지지 문화인 108인 선언에 동참했고, 김규식의 특사로 평양의 남북 협상에도 참여하였다. 6.25 전쟁 후에는 대학 강사, 『한국 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성주 출신 교육가이자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1964년 12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부인 해방과 현실 생활』[1925], 『귀농 운동의 의의』[1931], 『조선 경제론』[1926], 『식민지 문제의 기본 지식』[1931]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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