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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한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28
한자 鄭逑
영어공식명칭 Jeong Gu
이칭/별칭 도가(道可),한강(寒岡),문목공(文穆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3년연표보기 - 정구[한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정구[한강] 창녕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정구[한강] 동복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정구[한강] 통천군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정구[한강] 대사헌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정구[한강] 사망
출생지 정구[한강]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정구[한강] 묘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회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淸州)
대표 관직 대사헌(大司憲)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대장군 정의(鄭顗)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정응상(鄭應祥)으로 김굉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으로 이환(李煥)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구의 형은 정곤수(鄭崑壽)[1538~]인데 여섯 살 때 종숙 정승문(鄭承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자랐다. 정곤수는 선조 때인 1604년에 일등 공신에 책록되어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이름을 받았으며, 영의정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에 증직되었다.

정구의 부인은 광주 이씨(光州李氏)인 이수(李樹)의 딸이다. 아들 정장(鄭樟)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성주의 지리지인 『성산지』에서 정구의 후손들이 보인다. 손자는 정유희(鄭惟熙)와 정유숙(鄭惟熟)이다. 증손은 정창지(鄭昌址)이고, 6세손은 정동익(鄭東翼)인데 정조 때인 1777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8세손은 정위(鄭煒)이다. 정구의 후손들은 대체로 학문을 하는 가풍을 유지하였다.

[활동 사항]

정구(鄭逑)[1543~1620]는 1543년 성주의 사월리 유촌[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명민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63년(명종 18)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에게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정구는 과거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추천으로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사포서 주부(司圃曙主簿), 삼가, 의흥, 지례 등의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임하였다. 1580년(선조 13)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 1582년에 군자감 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고, 1585년 교정청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 군에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1574~1609]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는 상소를 올리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정구의 유능함을 알고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선조 때에 이조판서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정구(鄭逑)가 쓸 만하다고 재차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가 말하기를 , “불러도 오지 않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고 한다. 정구는 입사를 하더라도 중앙직보다는 외직을 선호하였는데 붕당 정치에 얽히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정구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는데 서너 번이나 사직하고자 하였다. 광해군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대사헌은 맡게 되었다. 그 뒤 정구는 고향 성주로 돌아와서 후학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을 하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구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을 스승으로 삼아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정구는 다방면에 걸쳐 통달하였는데 특히 예학에 밝았다. 그는 김우옹과 함께 성주 출신으로서 영남학파를 일군 대표 학자로 꼽히고 있다. 정구가 남긴 저술은 그의 상소문을 모아 놓은 첩인 『한강선생전은소(寒岡先生全恩疏)』, 예에 관한 다섯 성현의 책을 선집(選集)해 놓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그의 다양한 글을 모아 놓은 『한강선생화산록(寒岡先生花山錄)』, 그의 문집인 『한강선생문집 속집(寒岡先生文集續集)』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정구는 이황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心經發揮)』를 펴내는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묘소]

처음에는 창평(蒼坪)에 장사지냈다가 1663년 고을 북쪽의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인현산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구는 지방 유림들에 의해 이윤우(李潤雨)와 함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회연서원은 1690년(숙종 16)에 임금으로부터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및 노비를 하사 받았다. 한편,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鄭逑神道碑)회연서원 경내에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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